플라잉 휠체어 17화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17. 귀국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술도 배웠고, 사회생활이란 걸 해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정리하게 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1년간의 타지생활, 직장생활은 내 삶에 굉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스물 한 살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결의에 차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냥 감사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해 기대했고 그게 무엇이든지 해 낼 자신이 있었다.
한동안 나는 꿈에 젖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일본에서는 말이야’
‘거기 공장에서는 말이지’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안 해.’
‘한국은 왜 이러지?’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몸에 배인 배려와 깔끔함, 정갈한 태도, 단정하고 먼지 하나 없는 일본의 길거리가 자꾸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좌절이 쌓여갔다.
나는 다시 기어 다니고 있고,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일본에서 내가 쓰던 내 휠체어는 어디에 있을까.
내 작업대에선 누군가 일을 하고 있겠지. 내가 배웠던 기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화가 나고 슬펐다. 배운 기술을 발휘하려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려면 일본에서의 그 기계들이 필요했다.
여기서는 나 같은 사람이 일 할 공장이라곤 없었다.
한바탕 좋은 꿈을 꾸고 깨어난 것 마냥, 나는 현실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다른 세상을 맛봤을 뿐,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교만했고 바보였다.
내가 사는 동네의 길거리는 더러웠고, 나의 유창한 일본어는 써 먹을 곳이 없었다.
스무 살이 넘었으니 재활원으로는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내가 걱정하고 걱정했던 그 암울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쌓인 절망들이 실타래를 만들고 촘촘히 얽혀 불어났다.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정말로 일본 장애인들에게만 갖가지 축복을 내려 주신 것만 같았다.
어느 날, 강민재 선생님의 후배이자 우리를 한 때 가르쳐 주셨던 고영일 선생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너네 언제까지 이러고 가만히 있을 거니? 현악4중주 해보지 않을래? 너가 배웠던 게 이거잖아. 바이올린.”
바이올린을 한 나와 차인홍, 비올라 신종호, 첼로 이종현까지 우리는 아주 잘 어울리는 현악4중주 팀을 만들 수 있었다.
잊고 있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꽤나 잘 연주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가 연주할 때면 나도 신이 났고, 듣고 있는 일본사람들도 한국동료들도 좋아했다.
음악.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뿐이다.
다시 음악을 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