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베데스다 4중주단이 시작되었다.
18. 베데스다 4중주단
베데스다란 이름은 재활학교 남시균 이사장님이 지어주셨다.
우리 팀의 이름은 베데스다 말고는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어떤 보장도 해주지 않았지만 지금의 내겐 이거밖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스무 살이 넘었으니 재활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스무 살도 넘었는데 장남이 되가지고 집에 도움은 못될망정 더 이상 집에 빌붙어 살 순 없었다.
직장을 가질 수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일본어를 잘해도, 국민학교 졸업장 가지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베데스다는 그런 곳이다.
삶에 다른 어떠한 선택권도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다른 선택권이 있다면 굳이 언제 보글거릴지 모르는 연못 앞에서 38년이나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4중주를 제안하신 고 선생님이, 연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할 테니 걱정 말고 연습만 하라고 하셨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곤 했다.
고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집은 대사동에 있는 어느 2층 집의 2층이었다.
1층이면 좋았겠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생각보다 꽤 가팔랐다.
대문 열자마자 벽으로 붙어있는 계단은 시멘트가 여기저기 찍히고 고르지 않아서 잘못 오르내리면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이런 집이라도 구할 수 있는 건 정말 감지덕지였다.
장애인 한 명만 있어도 무슨 전염병 옮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는 데,
4명씩이나 함께 살며 하루 종일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으니 누가 좋아하겠나.
다 쓰러져가건, 2층이건 우리가 함께 살며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집이 마련되고 나니 요리와 청소 빨래를 어떻게 하나 고민됐다.
식구들과 함께 살았을 때, 재활원에 있었을 때, 일본에서 지낼 때도 빨래는 말할 것도 없고 부엌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할 때 재활원에서 우리랑 함께 생활하셨던 보모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다.
원생들이 악기 연습할 때 가장 좋아해 주시면서 지켜보고 계셨던 김현옥 선생님께서 우리가 4중주단을 만들었단 얘기를 듣고 집안일을 맡아서 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가장 가까운 데서 지켜봐 주시던 선생님이, 우리는 선생님에게 줄 돈이 없었는데도 선생님은 재활원을 나와서 우리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 빨래를 해주셨다.
재활원에 있을 때부터 김현옥 선생님은 우리들이 연습하고 있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변변한 라디오 하나 없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TV를 보던 시절에 음악을 듣기만 하면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고는 했지만, 우리 실력이 감동을 받을만하진 않을 텐데 그래도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집의 가사 일을 봐준다는 게 있을 법한 일이었겠나.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없는 밥, 빨래, 청소가 해결됐다는 고맙다는 생각뿐 그런 걸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를, 우리 베데스다 동료들을 향한 불쾌한 시선들만 생각했지 김현옥 선생님이 감내했을 시선들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 당시는 그랬다. 장애인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장애인을 돕는 사람들도 편하게 바라봐주지 않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거절할 상황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의 도움이 너무나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