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 재활원

플라잉 휠체어 7화

by 두꺼운 손가락

재활원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위에 있었다.




7. 성세재활원



대전 유성 외곽, 만년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주변에는 저 멀리에 교회 하나 말고는 볼 것도 없고 갈 데도 없었다.

60년대의 충청도 시골에 뭐가 있을 리가 있나. 한적하기 그지없었고, 굳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런 곳에 이런 시설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강이 흐르고 뚝방과 재활원 앞에 만년교 다리, 벌판과 나무들.

이 정도 그림이면 굉장히 호젓하고 아름다운 시골을 상상하겠지만,

여름에는 그늘 하나 없이 너무 덥고, 겨울에는 칼바람이 불고 바람 소리마저 요란하다.


재활원에는 나처럼 아예 걷지 못하는 사람, 걷는 것을 흉내 정도 낼 수 있는 사람, 팔이 없는 사람, 가지각색의 장애를 가진 10대 학생들이 60, 70명 정도가 있었다.

만년교가 보이는 쪽으로 운동장이 있었고, 학교 건물과 기숙사는 뒤쪽에 있었다.

기숙사에는 커다란 방이 4개가 있었는데, 한 방에 20명가량이 생활했다.


일과는 매우 간단하다.

매일 아침 6시에 예배를 드린다.

예배 후에 밥을 먹고 점심 전까지 학년 별로 나누어 공부를 배웠다.

말이 수업이지 점심 먹기 전까지만 수업을 하니까 오전은 어떻게든 시간을 대충 때우면 되는 거였다.


배워봐야 학력이 인정되는 거도 아니고,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거도 아니고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공부는 재미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다 같이 운동장으로 기어 나가 모래판에서 뒹굴며 놀았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나뿐이었던 국민학교에서 오히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학년이 바뀌는 학기 초엔 언제나 신고식을 겪어야 하긴 했지만, 그 신고식은 결국 내가 자기들과 동등하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인정하는 과정이었기에 불쾌한 상황만 있지는 않았다.


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고, 어머니의 도시락으로 유세도 떨었다.

우리 집의 중심은 나였고, 나의 불편함을 덜어 주는 방향으로 집안이 움직였다.


재활원은 모든 것이 달랐다.

나를 하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반대로 나를 보호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대우해주지 않았다.

모두 다 동등하게 장애가 있어서

나는 존재감이 없어졌고 다 똑같았다.


여기서는 다 스스로 해결을 해야 해서 나의 장애가 내 자신에게 더 드러나고, 내가 인정하고 익숙해져야 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가족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고 보니 식구들에게 고맙단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일어나면 오늘 입을 옷을 누군가 갖다 주었다.

아침마다 내가 전쟁터처럼 만들어 놓은 방은 학교를 다녀오면 반짝반짝 빛이 나 있었다. 내 손으로 연필 한 번을 깎아 본 일이 없었다.


우리들은 다 같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더럽고, 거칠었고,


나는 늘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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