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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을 땐 보이지 않는 것들

내가 생각하는 관계에서 중요한 것들

by 유지경성

개인적으로 살면서 점점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10대나 20대 초반에는 인생을 한 방향으로만 바라봤다. 내가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 사랑은 늘 설레고 기뻐야만 한다는 단편적인 믿음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국면을 겪다 보니, 인생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이제는 성공과 기쁨의 순간이 있다면, 실패와 좌절, 혼란도 당연히 함께 온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밝은 면이 더 중요할까? 아니면 어두운 면이 더 의미 있을까? 나는 어느 한쪽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다만 밝은 순간만큼이나, 어두운 순간에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감정이나 반응 속에서 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 그 사람이 어려운 순간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내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다.


이런 감각은 특정한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거의 모든 장면에 적용된다. 일, 연애 같은 일상 속에서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 경험들이 쌓이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계를 선택하는 기준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업무

일이 잘될 때는 누구나 괜찮아 보인다. 업무에서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대부분 다들 성실하고, 협업도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갈등이 없고, 커뮤니케이션도 부드럽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람 간의 마찰이 적고, 모두가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건 프로젝트가 틀어졌을 때다. 일정이 어그러지고, 방향성이 모호해졌을 때,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책임을 감당하고, 어떤 사람은 감정적으로 흔들리거나 남을 탓한다. 누군가는 회피하고, 누군가는 기꺼이 불편한 대화를 감수한다. 나는 이런 순간에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본다고 느낀다.


실제로 일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동료는 결과가 좋았던 사람이 아니라, 결과가 아쉬웠음에도 끝까지 책임감을 유지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유형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탓하지 않고,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태도는 다시 함께 일하고 싶게 만든다. 반대로,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어려운 상황에서 내부 갈등을 유발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과는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


결국, 내가 직장에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까다로운 상황에서도 갈등 없이 소통하며 중심을 잡는 사람이다. 어떤 프로젝트의 결과보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훨씬 더 오래 기억된다.


연애

연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땐 모든 게 특별하게 보인다. 감정은 뜨겁고, 사소한 행동에도 마음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그리고 익숙함이 찾아오면, 처음과 같은 감정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때부터가 연애의 본질이 드러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설렘이 가라앉고, 감정이 일상에 스며들었을 때, 상대가 어떤 말투를 쓰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갈등을 풀어가려 하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태도를 본다.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감정이 뜨거울 때 성급한 결정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 시기는 있는 그대로 즐기되, 안정된 시기에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한다. 감정적으로 뜨거울 때는 대부분이 관대하고 다정하다. 하지만 감정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반응, 말투, 거리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격을 더 정확히 보여준다.


결국 연애는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뜨거운 사랑이 잠시 유지될 때보다, 사랑이 어느 정도 식은 순간에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관계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순간이 정말로 중요한 순간이자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삶은 단순하지 않다. 기쁨과 성취가 있으면, 그만큼의 무너짐과 고통도 있다.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감정이 고조된 밝은 순간도 중요하지만, 삶의 방향은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바뀌기도 한다. 어두운 순간 속에서 우리는 멈춰 서고, 다시 방향을 정하게 된다. 그런 순간들이 나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삶을 더 넓게 바라보게 해 준다.


나는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각과 바닥을 갖고 있는지는 오랜 기간 함께한다. 위기 상황에서 드러나는 태도,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감정이 식었을 때의 자세, 결과가 나쁠 때의 말과 행동. 이런 것들이 결국 ‘그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순간마다 내 바닥이 어떤 모습인지를 스스로 돌아보고 깨우치고 교정하려 한다. 바닥을 본다는 건 결국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별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별은 밝은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주변이 환하고 모든 것이 명확할 때는, 누가 빛을 내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둠이 찾아오고,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빛이 스스로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빌려온 빛이었는지. 진짜 빛나는 별은 어둠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빛을 낸다. 관계도, 사람도, 사랑도. 그런 순간에야 진짜가 드러난다고 믿는다.


Mayasan, Kobe,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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