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지금, 함께할 수 있는 기억

by 유지경성

평일이면 여러 가지 일정을 소화하지만, 주말에는 조금은 여유를 두고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저녁식사하며, 오늘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글로 남겨보려 한다.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 편안함은 설명하기 어렵다. 무언가를 하러 가는 것도,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내려앉는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할머니와 함께했던 자리에서 이상하리만치 안정감을 느낀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할머니 손에 자라며 보냈다. 그땐 몰랐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이 내 감정의 기초를 만든 시간이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따뜻한 분위기, 그게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힘이 된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분이 아니었다. 내 말을 따지지 않고, 판단 없이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엄마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져 있다.


다만 지금 아쉬운 점은, 할머니가 오랜 시간 치매를 앓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계시며, 기억의 대부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시간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다. 기억은 대체로 치매 증상이 본격화된 15년 전쯤의 시점에서 멈춰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놀랍게도, 내 이름은 잊지 않으신다. 내가 방문하면 몇 마디 짧은 말로도 나를 알아보고, 안부를 묻는다.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 안에 남아 있는 어떤 선명한 기억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특히 할머니는 나와 함께 보냈던 내 다섯 살 전후의 시절을 자주 언급한다. 유치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즐거웠는지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하시곤 한다. 시점도 불명확하고 흐름도 일정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할머니의 감정은 나에게 또렷이 전해진다. 나는 사실 그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듣고 있으면 "그랬구나" 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워낙 자주 듣는 이야기다 보니 수강으로 따지면 누적 횟수가 제법 된다. 앞으로도 이 누적 횟수가 계속 갱신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슬펐던 할머니의 변화도 이제는 하나의 삶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할머니의 최근의 기억은 금세 잊히지만, 과거의 행복한 순간들은 여전히 할머니 안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지금의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과거의 기억을 매개로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가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때 얼마나 많은 따뜻한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볍게 넘겼던 일상적인 감정 교류나 함께 보낸 평범한 하루가 훗날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영어 표현 중 하나가 떠오른다.

A man with a thousand worries has only one when he is sick.
평소엔 수많은 걱정 속에 살아가지만, 막상 아프고 나면 그 모든 걱정은 사라지고 건강 하나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 사람에게는 몇 안 되는 선명한 기억 하나가 전부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끝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우리도 모든 걸 기억하지 않는다. 끝까지 남는 건 결국 몇 순간뿐이다. 그 몇개가, 삶의 온도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