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바라보는 방식
항상 새해가 되면 물리적인 시간은 불과 얼마 전의 12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마치 새로운 챕터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올해에는 어떤 ‘새로움’이 있을지 생각하게 되고,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내 인생이 지금 잘 흘러가고 있는지, 방향은 맞는지 같은 다소 비장한 철학적 질문까지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돌이켜보면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에는 선택을 앞두고 늘 꽤나 2차원적인 질문들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지금 회사를 더 다녀야 하는지, 이 직무가 정말 나에게 맞는지, 전문성은 제대로 쌓이고 있는지, 보상은 충분한지 같은 질문들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갈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고민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언제 그만두는 게 현명한가, 이직을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회사와 어떤 역할이 나에게 맞을까.
사실 이런 고민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아니 어쩌면 매달 반복해 왔던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길에 대해 한 번쯤은 의심하고, 답답함이나 결핍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이상적으로 상상해 보는 로망 정도는 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장인에서 학생이 되면서 이런 생각을 방식도 다차원적이면서 생각하는 시간들이 눈에 띄게 길어졌다. 그 이유는 하루를 타인이나 조직에 의해 끌려다니기보다, 스스로 구성하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자기 삶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할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생긴다. 물론 이런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학교라는 또 다른 구조에 끌려다니며 지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다.
나는 이 차이를 종종 비유로 설명하곤 한다. 직장생활은 산티아고 순례길과 닮아 있다.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길 위에서 어떤 과정과 역경을 어떻게 견뎌낼지를 고민하는 구조다. 반면 학생의 시간은 사막 한복판에 떨어진 상태에 가깝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어떤 속도로 움직일지, 언제 멈출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둘 다 분명 어려운 길이지만, 고민의 성격과 경험의 질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조금 더 현재 내가 가진 고민으로 내려와 보면, 요즘의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감각을 느낄 때가 많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무언가를 실행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구체적인 형태로 잡히는 것은 없다. 정해진 것도, 확실하게 구조화된 것도 없는 상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 거나 ‘잘 정리되어 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종종 스트레스를 받거나,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이런 불안과 결핍은 나를 성장하게 만들고,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차원의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감정을 마주했을 때, 생각을 잘 구조화하지 못하고 방향을 건강하게 잡지 못할 때다. 과거의 나는 이런 순간에 종종 인생무용론이나 ‘계획해서 뭐 하나’ 같은 무기력한 상태로 빠지곤 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나름대로 이를 다루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왔다. 그 방식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어떤 순간마다 내가 느끼는 스트레스나 외적 자극들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막상 구체화하기 어려운 감정인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몹시 슬프지만, 왜 슬픈지 깊게 생각해 보면 이유를 명확히 말할 수 없고, 화가 나 있지만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나야 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냥 감정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막상 구체화해 보면 그럴 이유가 아니었던 적도 많다. 내가 가장 혼란스럽고 스트레스를 크게 느끼는 순간들은, 생각해 보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 판단하거나 결정하려고 할 때다.
특히 어떤 결과, 타인의 반응, 시장 상황, 구직 환경, 평가, 운 같은 요소들을 한꺼번에 붙잡으려 하면 선택의 기준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실제로는 하나의 목표나 방향을 두고 고민하고 있음에도, 결정을 명확하게 내리기 어려워진다. 상황이 단순할 때보다 선택지가 많고 결과가 불확실할수록 사람은 더 쉽게 흔들린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대략 알고 있지만, “이게 맞나?”, “이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같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풀수록 더 복잡해진다.
내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힘들어지는 지점을 곱씹어보면,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예측하고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는 않을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고려하려는 순간, 판단은 쉽게 마비된다.
그래서 생각을 의도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전자는 나의 판단, 선택, 태도, 원칙이고, 후자는 결과, 타인의 반응, 환경, 운이다. 중요한 점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무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들이 내가 판단해야 할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이 선택이 성공할까?” 혹은 “이 선택을 해도 잘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애초에 답이 없다. 미래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 선택은 지금의 내가 보기에 정직한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에 부합하는가?”를 묻는다. 결과가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의 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내가 체감하는 문제의 크기는 줄어든다. 불안의 상당 부분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을 때 생기기 때문이다.
선택의 목적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의사결정의 구조를 단순화하더라도, 한 가지 더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철학적인 사고일 수 있지만, 내 행동과 선택, 결정들이 어떤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 아래에서 서로 부합하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우리 삶 전체에도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목적이나 목표를 명확히 정의하는 일은 때로는 부재의 영역에 가깝다. 나 역시 삶의 궁극적인 방향에 대해 비교적 최근에서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불과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인생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단기적인 삶을 살아보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방향이 맞는지를 여러 갈래로 경험해 보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지식 축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특정한 조건을 떠나 단순한 순간적 행복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잘 사는 상태에 가깝다. 여기서 앞선 의사결정의 기준과 함께 결합해 생각해야 할 질문은 “이 선택이 나를 기분 좋게 하는가?”가 아니라, “이 선택이 나라는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가는가?”라는 질적인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이 선택이 내 삶 전체의 맥락에서 나를 어떤 상태로 이끄는지를 고민하려 한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면, 만약 나라는 사람의 자서전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의 직업적 선택 하나만으로도 해당 챕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선택에 따라 이후 5년, 10년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내가 내 자서전을 다시 읽어보았을 때 어떤 모습의 내가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줄지 다시 묻게 된다. 이 질문은 일뿐만 아니라 사랑을 포함해 삶의 여러 영역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어려운 길로 보이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내 자서전이 조금은 낭만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당장의 편의보다는 낭만을 선택하는 편이다.
이런 사고의 프레임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많은 선택지가 걸러지면서 감정적인 피로도도 줄어든다. 단기적으로는 편하지만 장기적으로 나를 소모시키는 선택,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나의 방향과 맞지 않는 선택, 수단임에도 목적처럼 집착하고 있는 선택들은 굳이 깊이 고민하지 않게 된다. 선택을 순간의 점이 아니라 삶이라는 긴 선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면, 판단은 훨씬 깔끔해진다. 이 질문 안에는 운도, 타인의 평가도, 불확실한 예측도 없다. 오직 나의 기준과 나의 방향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결코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상황이 유난히 가혹해서도 아니다. 대개는 내가 따르던 기준이 흐려졌다는 신호에 가깝다. 그리고 그 기준을 다시 찾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혼란한 시기에 흔히 답을 찾기 위해 타인을 바라봤었다. 부모의 경험, 친구의 조언, 누군가의 성공 사례.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 누구도 나 대신 선택해 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타인이 건네는 말은 참고일 수는 있어도, 결코 나의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토록 찾으려 애쓰는 ‘답’은 본질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올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미리 주어진 정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답’이란 객관적으로 맞고 틀린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기로 선택하느냐에 대한 선언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방향을 향해 살고 싶으며, 어떤 불완전함까지 감수할 수 있는가. 그 선택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고, 그 책임 역시 나만이 질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삶의 "답"이란, 어디엔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내가 바라는 만큼 살아가는 그 태도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머릿속에서 구조를 잡아보아도 막상 일상으로 돌아오면 중요한 건 생각보다 단순하다.
잘 먹고,
좋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하루 안에서 작은 즐거움을 하나쯤 찾고,
그 하루가 나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
나는 친구한테 가끔 농담처럼 말한다.
“힘들 땐 그냥 치킨 먹고 잘 놀면 된다”라고.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사실 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