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는데 비어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다.
마요르카에서 혼자서 시간을 보낸 지 딱 1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사회적 디톡스를 했다. 일주일 동안 혼자서 지냈고, 운전하는 동안, 책을 보는 동안에도 고독함을 유지했다.
주변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있으면서 더 강하게 느껴지는 공허함일지, 고독일지가 때로는 정말로 싫기도 하다. 그러나, 가끔씩 혼자에게 고독을 강제로 주는 이유는 다른 잡음 없이 혼자서 스스로에 대해서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하고, 다른 잡음 없이 나만의 소리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어볼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주는 강제적 공간의 개념이다.
만약 마요르카에 오지 않고 런던에서 연말의 시간을 보냈다면, 아마도 그런 외로움이 느껴질 때 사람을 만나거나 무언가 해보려고 노력했을 텐데 이렇게 섬에서 혼자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면 무엇도 할 수 없고, 혼자서 혼자만의 감정을 견뎌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 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마요르카에서의 하루는 굉장히 규칙적이었다. 오전에 일어나서 테니스를 3~4시간을 쳤다. 그리고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비가 많이 왔고, 때로는 해가 뜨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저 방에서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도 보았고, 주식 관련 종목들을 공부하기도 했다. 날씨가 좋으면 그저 해변에 가서 앉아서 바다의 소리를 듣고, 산으로 가서 산속의 고요함을 느끼곤 했다. 마요르카는 대부분 2명 혹은 가족단위로 여행을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시내처럼 번화한 곳도 아니며, 혼자 와서는 정말로 고독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 내가 느낀 감정은 일종의 공허함이다. 이 공허함은 작년부터 내가 글을 쓸 때도 언급했던 감정이지만 잘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래서 조금 더 이 감정을 들여다보고 정리해 보려고 생각을 했다. 조금은 내 내면의 소리를 지금은 조금 더 정리된 상태로서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2025년의 마지막을 이 감정에 대한 정리로 마무리를 해보기로 했다.
내가 느끼는 이 공허함을 정의하려면 몇 가지 내 상태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나는 이론적인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상태의 실마리를 찾기에는 이론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출발점이 되는 이론으로 3가지 정도의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이론을 가져와보았다. 아마도, 몇 가지는 살면서 들어본 적 있는 이론들일 것이다.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
일단, 어떤 상태,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내가 왜 공허함을 느끼는가로 접근해 보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브라함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이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단계적으로 보았다. 생존과 안전이 충족되어야 관계와 존중을 추구할 수 있고, 그 위에서야 비로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겉으로 보면 나는 부족함이 없다. 경제적 안정이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육 환경에 있으며, 이동과 선택의 자유도 충분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는 생리·안전·존중의 영역을 이미 통과한 상태다. 즉, 불안이나 결핍에서 비롯된 고통은 아니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살기 힘들어서” 느끼는 공허는 아니다.
그런데도 설명되지 않는 빈 감각이 남아 있다. 이 지점에서 매슬로의 이론은 충분하지 않다. 욕구가 충족되었는지는 말해주지만, 삶이 왜 공허하게 느껴지는지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그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론은 자기 결정이론이다. 이 이론을 정립한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욕구를 제시한다.
자율성(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 유능감(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관계성(누군가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중요한 점은,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해야 삶이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나를 보자면, 나는 자율성과 유능감에서는 높은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선택의 자유도 있고, 성취의 경험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관계성면에서는 조금 자신이 없다.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부족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들이 나를 사랑하는 지점에서도 충분하다고 느끼고, 가까운 친구도 있다. 그럼에도 무언가 지속적으로 함께 쌓여가는 구조적 연결은 부족하다는 근거 없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에드워드와 리처드의 생각을 들여다 보고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주장한 관계성의 결핍은 그저 가까운 친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과의 연결은 모두 같은 깊이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대화를 나누고, 웃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관계를 "관계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 말하는 관계성은 그보다 훨씬 좁고 깊은 개념이다.
친분은 만남이 중심인 관계다. 연락이 오면 반갑고,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러나 각자의 삶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으로 흘러간다.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의 리듬이 바뀌지는 않는다. 일정도, 선택도, 미래 계획도 각자에게 닫혀 있다. 친분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는 있지만, 삶의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반면 관계성은 삶이 서로 얽혀 있는 상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친밀도보다 구조적 연결이다. 일정이 공유되고, 다음 만남이 예정되어 있으며, 함께 쌓아야 할 시간이 남아 있다. 내가 빠지면 계획이 바뀌고, 내 선택이 상대의 내일에 영향을 준다. 이때 관계는 단순히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축이 된다.
그래서 친분 속에서는 외롭지 않을 수 있지만, 여전히 비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관계성이 작동할 때는 감정이 크지 않아도 삶의 밀도가 달라진다. 하루의 끝이 혼자서 닫히지 않고, 내일로 이어진다. 오늘의 시간이 누군가의 기억과 계획 속에 함께 저장된다. 따라서, 자기 결정이론이 말하는 관계성 부족은,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외로움이라기보다 내 삶이 누구의 삶과도 함께 축적되지 않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문제는 만남의 수가 아니라, 관계의 형태다. 더 많은 친분이 아니라, 시간과 선택이 공유되는 구조가 필요해지는 순간에 나타나는 감정이 바로 이 공허다.
자기 결정이론상에서는 언급한 3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느끼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 이론 상에서 나를 보자면, 결국에는 장기적인 커리어 측면에서의 관계성의 부족과 삶을 살아가는 동반자로서의 결핍 2가지가 해당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버핏과 멍거처럼 자신의 커리어 영역에서도 평생 가는 신뢰할만한 친구를 만들고 싶고. 그리고, 동시에 나의 삶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의 부분 또한 채워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의 실존적 공허
빅터 프랭클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을 쾌락이나 성취가 아니라 의미의지(will to meaning)라고 정의했다. 그 의미의지란 기분이 좋아지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 삶의 시간과 노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방향감각이라고 설명한다. 프랭클은 이 방향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상태를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라 불렀다. 이는 우울처럼 기능이 무너지는 상태가 아니라, 삶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데도 내적으로는 비어 있는 감각이다.
왜 이런 공허가 생기는지에 대해서 프랭클에 따르면, 인간은 생존이나 결핍 속에 있을 때는 목표가 자동으로 주어지지만, 조건이 충족되고 자유가 커질수록 오히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삶을 맡길 대상이 정해지지 않으면 공허가 생긴다. 실제로 프랭클은 강제수용소라는 극단적 환경에서조차, 사랑하는 사람이나 해야 할 일을 마음속에 붙들고 있던 이들이 더 오래 버텼다는 사례를 관찰했다. 조건이 아니라 의미에의 연결 여부가 인간을 지탱한다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이 이론 상에서 보자면 프랭클의 관점에서 지금의 공허는 어떤 특별한 문제가 아니다. 이 공허함은 삶이 무너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더 이상 자동으로 주어지는 목표가 사라졌고, 이제 삶의 방향을 스스로 맡기라는 요구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며 삶을 어디에 헌신할지 결정해야 할 시점에 나타나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공허는 일종의 결핍을 해결한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결핍된 무언가를 충족시키며 완성되는 삶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을 때, 삶은 조용한 공백으로 다음 단계를 요청하는 듯하다.
지금 부족한 것은 더 많은 성취나 관계의 수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부족한 것은 의미를 맡길 대상이다. 하루의 시간과 선택이 반복적으로 귀속되는 방향, 내가 오늘을 쓰면 내일로 이어질 구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잘 흘러가지만, 그 하루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쌓이는지는 흐릿하다. 삶이 멈춘 것이 아니라, 아직 연결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공허는 의미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아직 특정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이 공허는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정하라는 요청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나를 조금 더 바라보자면, 학교를 다닐 때, 그리고 회사생활을 할 때, 그리고 지금 다시 대학원생으로 돌아온 시점에서 일종의 방향감각이 애매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느껴지는 공허함의 일종이라고 생각도 된다. 내가 살아갈 방향이 많이 좁혀지긴 했지만 내가 바라는 것만큼 정말로 좁혀졌는지 체감되지 않기도 하고, 그 방향성에 맞게 내가 지금 살고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공허를 돌아보면, 그것은 결핍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다. 물질적 조건, 사회적 위치,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나는 이미 충분히 충족된 상태에 와 있다. 매슬로의 욕구 위계로 보더라도, 생존과 안전, 성취의 영역에서 더 큰 행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가 금전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떠나, 조건이 주는 만족감은 이미 체감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공허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를 자기결정이론의 언어로 옮기면 답은 비교적 명확해진다. 자율성과 유능감은 충분히 충족되어 있지만, 관계성(Relatedness) 측면에서 내 시간과 선택이 누군가의 삶과 장기적으로 얽혀 축적되는 구조는 아직 약하다. 사람은 있지만, 함께 쌓이는 내일은 희미하다. 그래서 외롭지는 않지만 비어 있고, 잘 작동하지만 밀도는 낮다.
이 상태를 빅터 프랭클의 관점으로 보면, 이 공허는 전형적인 실존적 공허다. 내 삶의 노력과 시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에 헌신하고 있는지에 대해 방향이 아직 명확히 고정되지 않은 전환기적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거에는 이 공허가 어떤 성취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어디에서 흘러나온 감정인지조차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해진 점이 있다면, 이 공허는 더 많은 커리어적 성취나 물질적 조건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배움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나에게는 하나의 성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말에 2026년을 바라보며 세운 목표는 조금 심플하면서도 단순하다. 이 여백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는 것, 대신 그 여백 위에 무엇을, 누구와 함께 쌓을지를 선택하는 일이다. 지금의 고민은 예전처럼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른 채 무언가를 채우려 했던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미 충분한 상태에서, 앞으로의 시간을 어디에 쓰는 것이 나에게 삶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모두가 2025년 현재를 살아가며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2026년만큼은 올해보다, 그리고 오늘보다 조금 더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