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칼라책방 Oct 01. 2023

5, 내 인생 디폴트 값

살림 2-2 입히기

인류가 발명한 것 중에 세탁기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있을까? 세탁기 이전의 빨래는 어땠을까? 우선 물가에서 주물주물 조물조물 때를 뺀 후 오른쪽과 왼쪽으로 비틀어 최대한 꼬옥 짠다. 그리고 탁탁 털어 각을 잡아 넌다. 해와 바람이 빨래를 말리는 동안 부디 아무 일이 없어야 한다.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엔, 그 시간에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면 앞순서로 회귀하여 반복 재생해야 한다. 


어느 날 모든 여성의 삶을 나아지게 한 세탁기가 고장 났다.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았다. 장마철이라 습기를 말리면 될 거라는 상담원의 안내는 틀렸다. 수리 기사가 방문하기까지 2주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세탁기는 심각한 고장으로 진단되었다. 차라리 새 제품을 구매하는 게 낫다는 전문가의 권유에 따라 바로 주문하였지만, 이틀 후 도착한 세탁기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다시 화물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설치가 불가능한 장소라고 했다. 


기사님, 그럼 세탁기를 놓으려면 뭐가 필요한 건가요?

여기, 여기가 10cm는 더 나와있어야 해요.

안으로 쭈욱 집어넣으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불가능해요.

그럼 타일로 시공하면 되나요?

그럼요. 시공 마치면 전화 주세요. 바로 설치하겠습니다.


그래서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채워 타일로 마무리했다. 속눈썹 연장술은 들어봤어도 타일 연장술은 낯설었다. 처음이라지만 제법 잘 처리했고, 세탁기 설치 후 동글동글 작동하는 세탁기를 보며 기념촬영도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우리 집 세탁기 잘 돌아간다!!


우리 집 세탁기는 다짜고짜 새벽부터 한 타임 돌아야 한다. 색깔 빨래는 건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행거에 널어 말리기 위해서다. 수건 같은 건 저녁에 돌려도 괜찮고 하루 건너뛰어도 여분이 있지 않는가. 수건은 입고 나가는 게 아니니 모아서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3주는 무방하지 않았다. 상당히 불편했던 시간이었다.


세탁기의 이런 수고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5인 가족의 빨래를 해대느라 아침저녁으로 빙글빙글 돌았을 세탁기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생각해 보면 세탁기가 며칠 쉬는 날도 있었다. 우리 가족이 집을 비웠을 때인데 세탁기 입장에서 그리 반가운 쉼은 아니었을 것 같다. 5인 가족이 며칠 만에 귀가하여 내놓는 빨래를 하루에 서너 번씩 완료해야 했으므로 오히려 더 고되지 않았을까? 


다른 집도 매일 같이 세탁기를 돌리는지 물어보았다. 아닌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4인 이하 가족이었으므로 며칠씩 모아서 한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 집은 왜 하루라도 빨래를 안 하면 문제가 생기는 걸까? 워낙에 땀이 많기도 하지만 운동장에서 축구하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쓴 체육복을 당장 내일 또 입어야 한다는 용감무쌍한 아들들을 세탁기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매번 물가에 가서 빨래판에 대고 문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빨래터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세탁기다. 5인 가족이 말끔하게 입고 나설 수 있는 건 모두 세탁기 덕분이다.


어떤 집은 요일을 정해서 빨래를 한다드만. 그게 과연 가능한 건가? 우리 5인 가족은 딱 기본값으로 살고 있는데 다른 집과 너무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다. 청소년 셋이 포함된 5인 가족은 외식보다는 집에서 먹는다. 마트 과자는 1+1보다 2+1이 반갑다. 아이들 입는 면 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g 단위로 소량 포장된 음식은 보기에도 간지럽다. 닭다리는 3kg은 구워야 다들 잘 먹었다는 소리를 한다. 웬만한 유통기한은 넘길 일이 없지만 설령 넘겼다 하더라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먹어도 아무 탈 안 난다는 걸 우리 5인 가족이 증명하고 있다.


'5'가 이렇게도 부담스러운 숫자였던가? 지금 당장 한 손을 들고 손가락을 쫙 펴보시라. 다섯 개의 손가락이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적당하고 꼭 맞는 값인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가락마다 길이도 너비도 제각각이라 다채롭기까지 하다. 차도 5인승 승용차가 제일 흔하고 그 중요한 카운트다운조차도 5, 4, 3, 2, 1, Fire! 라고 하지 않나. '5'를 읽으려면 입술을 모으고 앞으로 쭈욱 내밀어야 한다. 오~♡ 나도 모르게 내가 귀여워지는 순간이다. 내 인생 디폴트 값으로 주어진 '5'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먹이는 게 8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