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와 사이언스의 미학 - MD
*품평회는 리테일 패션 브랜드에 중요한 연례 행사중 하나였습니다. 한국 디자이너가 밤 새며 준비한 시제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중국 지사로 출장을 오고(우리는 중국 진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디자이너는 한국 본사 근무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 스케줄에 맞춰 드넓은 중국 각지의 점장들을 초대하여 시제품 디자인에 대한 품평을 시작 합니다. 품평회 결과를 기반으로 다음 시즌 제품을 결정하면, 바로 칼라/수량 결정 회의를 하고, 연이어 스케줄 회의, 원가 회의, 품질 회의 등을 진행 합니다. 당시 우리 브랜드는 하염 없이 늘어지는 생산 스케줄 개선에 대한 숙제, 높은 원가 구조 때문에 팔수록 악화되는 손익 문제, 품질 안정화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가득이었거든요.
*홀세일(도매) 중심 브랜드는 점장 대신 바이어들을 초청하여 쇼케이스 형식의 패션쇼를 겸비한 수주회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1. 품평회
디자이너는 기획이 전달한 아이템 기획서를 기반으로 1.5~2배 정도의 디자인을 시제품화 합니다. 우리는 디자이너가 준비한 샘플을 아이템별로 분류한 후에 점수표를 만들어 점장들에게 배포하고, 품평회가 끝나면 집계를 하죠. 빠른 집계 이후 순위대로 나열한 후에, 1차 평가 결과에 대한 점장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질의응답 시간이 중요한 것은, 어떤 미세한 이유 때문에 최저 점수를 받았던 디자인에 약간의 개선점만 적용해도 전략상품으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해당하는 얘기이지만, 모든 기획자(경영자)는 숫자를 숫자로만 봐서는 안되고 그 숫자 이면의 이유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칼라/수량 결정 회의
품평회를 마치고 점장들이 매장으로 복귀하면, 디자이너와 기획간에 스타일별 칼라와 수량 결정 회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 때, 품평회 결과 뿐 아니라, 과거 유사한 제품의 판매 실적, 향후 트렌드 전망, 이번 시즌 스타일링(코디네이션) 계획 등 고려해야할 많은 변수를 반영하여 1차 생산 수량의 윤곽을 잡습니다. (이 파트를 일단 짧게 쓰는 이유는, 생산 예산에 맞춰 액추얼 수량을 확정하여 발주하고 재고 관리하는 내용은 다음 챕터에서 상세히 다룰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3. 생산 스케줄 회의, 그리고 생산 관리
이제, 기획, 디자인 부서 뿐만 아니라 생산, 구매 부서 등이 합류하여 시즌 납기 준수를 위한 세부 스케줄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디자이너는 시제품 컨펌을 한 번이라도 더하기 위해 최종 샘플 완료 시점을 늦추려고 애를 쓰고, 한국 소재 구매 부서는 원부자재 출고 일정에 최대한 버퍼를 잡으려 애쓰고, 중국 생산 부서는 구매에게 원부자재를 빨리 보내달라고 원성입니다. 기획자에게는 목소리 크기에 휘둘리지 않고 계획을 확정할 수 있는 이해도와 협상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기획자 입장에서 생산 스케줄 관리는 매우 고된 네버앤딩스토리와 같답니다. 품평회 이후 실제 제품이 생산되어 매장에 입고/판매를 시작할 때까지 모든 스타일별 세부 스케줄을 체크하고 관리해야하니까요. 납기 지연은 곧 판매 손실을 의미하고, 제 때 팔지 못한 제품은 악성 재고가 되어 수익 관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스케줄 관리에 소홀했던 초기에는 놓쳤던 것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스케줄을 세부적으로 세우고 관리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부자재 완료 - 생산 완료' 이런 식으로만 스케줄을 잡아 놓으면, 원부자재 완료 이후 수출입에 걸리는 시간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서 전체 스케줄을 크게 지연시키게 됩니다. 기획자는 모든 생산 과정에 대한 이해력이 필요하고, 각 과정을 세부 업무로 나누고 각 업무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지런을 떨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번 시즌 부지런이 끝나가기 무섭게 다음 시즌 스케줄이 시작된다는 것은 안비밀! 제가 네버앤딩스토리라고 했죠?
당시 150일을 초과했던 생산 스케줄을 90일까지 줄이기 위해 별 짓을 다해 봤습니다. zoom 같은 화상 채팅앱이 없었던 구석기 시대였기에, 우리는 메신저 채팅을 통해 매주 정기 회의를 했습니다. 납기가 가까워올 수록 좋지 않은 소리가 오가기도 하고 참여율도 떨어집니다. 일단, 저는 모든 회의 내용을 날 것 그대로 임원께 보고하는 치사한 방법을 썼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엑셀 스케줄표에 색깔 서식을 넣어 일명 '신호등 관리'표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데드라인 5일 전부터는 해당 업무의 셀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납기 일정이 지연되는 순간 빨간색으로 변하게 설정한 것입니다. 모든 부서에서는 제가 설계하여 배포한 엑셀 파일을 열 때 마다, 각자 당당해야할 프로세스의 데드라인 또는 지연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엑셀 파일을 매일 확인 시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일이었고, 스케줄 수정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 마다 업데이트한 파일을 공유하는 것이 번거로웠죠. 노션이나 구글 스프레드 시트가 없던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엑셀을 100% 대체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엑셀은 정말 어마무지 똑똑하고 편리한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 이랍니다. 여하튼 20년 전 저의 '신호등 관리' 아이디어가 뭔가 제대로된 인프라로 만들어져 알람 기능이 강화되었다면 훨씬 효과가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패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생산 공정 관리에 관심 있으신 분은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The Goal - 엘리야후 골드랫>을 추천 드립니다. 더 골은 공장 운영과 경영 이론을 소설 형식으로 설명한 책으로, 제조 산업에서의 생산성과 공정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Chat GPT에게 이 책의 핵심 교훈을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네요 :) 저도 나중에서야 읽었지만, 기획자로서 가졌던 마인드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공감할 수 있었던 책입니다.
목표의 중요성
모든 조직은 목표를 가지고 운영되어야 합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목표 없는 조직은 방황하고 발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변화와 지속적인 개선
조직은 항상 변화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고정된 방식으로 운영되는 조직은 경쟁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개선을 통해 공정과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목 현상
시스템에서 가장 느린 부분이 전체 작업의 속도를 결정한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병목 현상을 식별하고 해결하여 전체적인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과잉 생산과 재고
과잉 생산과 재고는 자원을 낭비하고 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효율적인 재고 관리와 생산 계획을 통해 재고를 줄이고 자원을 최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전체 시스템 최적화
조직은 전체 시스템을 고려하여 운영되어야 합니다. 개별 부분을 최적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을 최적화하여 조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4. 원가 회의
당연히 진행했어야 하는 이 원가 회의를 처음부터 진행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테고리 매니지먼트를 통해 스타일이 개선되고, 생산 프로세스 관리를 통해 납기가 개선되자 다행히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매출 상승에도 불구하고 수익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경영진의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브랜드는 대부분 한국산 수입 원부자재(중국 생산 입장에서는 수입)를 사용하고 있었고, 초기 브랜드의 적은 생산 수량 때문에 경제적 스케일에 이르지 못하다보니 원가 구조가 높았습니다.
원가 개선을 위해, 품평회 이후 결정된 스타일 하나하나를 해체하며 원부자재를 결정하는 회의를 진행했는데, 이 회의를 통해 원부자재 상당 부분을 중국산으로 바꿔가기 시작했어요. 당시만해도 중국산 품질이 안정적이지 못해 디자이너들의 불신과 타협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비율을 점차 늘려가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동시에, 불필요한 디자인 요소가 없는지 점검했어요. 소매단 버클 위에 얹는 단추가 2개나 필요한게 맞는지, 저 벨트는 꼭 있어야 하는지, 요척 효율을 높이려면 원단을 44인치로 생산하는게 좋을지 55인치 대폭으로 생산하는게 좋을지 등등 한 벌 옷을 다 해체할 정도의 디테일한 점검을 했습니다. 기획자인 저도 왠만한 옷을 보면 요척이 얼마나 나오겠다 얼추 계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죠. 마라톤 회의를 각오하며, 모든 스타일에 적합한 판매가에 적정한 원가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만, 아주 가끔, 기획 의견을 너무 잘 들어주는 착한 디자이너의 옷이 너무 평범해져서 팔리지 않는 역효과가 나기도 하니, 원가 회의는 디자인 영역을 함부러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해야 합니다 :P
5. 품질 회의
기획, 디자인, 생산, 구매 부서 뿐 아니라 QC(품질 관리) 팀까지 합류하여, 지난 시즌 출시된 제품의 품질 비판 시간을 갖는 회의 입니다. 그동안 매장에서 축적된 고객의 소리를 바탕으로 품질(원부자재, 봉제, 핏 등) 관련 피드백을 공유하고 개선안을 제시하는 회의인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런 노력들이 쌓여 브랜딩이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E사 중국 지사에서는 이 품평회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을까 궁금하네요. 시즌기획이 월기획을 넘어 드랍식 기획으로 변화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많은 변화가 있겠죠. 하지만, 모든 기초가 되는 원리/원칙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재고 관리 챕터는 다음주로 미뤄야할 것 같아요. 아주 할 말이 많은 중요한 챕터가 될 것 같으니 기대해 주세요.
To be continew with 발주 및 재고 관리(뉴스벤더 모델, 소진율 관리, 리오더), 경영&생산 계획(시즌기획, P기획, 월기획, 드랍기획)
※ 이 글은 발행 이후에도 계속해서 업데이트 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