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하여 I

부모

by 그래도


부모



1.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시간이 완전히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부모 앞에서 조금 더 설명하게 됩니다.

괜찮다고 말하고, 잘 지낸다고 덧붙이고, 굳이 묻지 않은 일까지 정리해 이야기합니다.

독립해서 살아가고 있어도, 부모 앞에서는 자신을 한 번 더 정돈하게 됩니다.

2. 부모가 특별히 간섭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부모는 예전보다 덜 묻고, 덜 관여하고, 오히려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 앞에서 스스로를 정리합니다.

그 반응 때문이라기보다, 이미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부모의 시선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3. 부모와의 관계는 현재의 관계라기보다, 선택 앞에서 먼저 떠오르는 기준으로 남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이게 좋은 선택인지보다

이 이야기를 부모에게 하게 된다면 설명이 길어질지,

조금은 납득시키기 어려울지,

그 장면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부모라는 기준 앞에서 설명하는 장면이 먼저 그려집니다.

4. 그래서 선택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결정한 일인데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다 해낸 것 같지 않은 마음이 남습니다.

가능한 일보다 설명하기 쉬운 일을 고르게 되기도 합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으로 바꾸어 본 적도 있습니다.

부모는 멀어져도, 그 시선을 의식하는 습관은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부모와의 관계는 멀어져도, 선택 앞에서는 쉽게 지나가지 않습니다.

5. 멀리 살아도,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생각이 맞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이 일을 부모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래서 부모와 멀어져도, 선택 앞에서는 여전히 부모가 먼저 떠오릅니다.

애쓰지 않아도 계속되고, 설명할 말을 먼저 떠올리는 순간, 그 선택은 완전히 혼자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6. 어른이 된다고 해서 부모의 영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 기준과 거리를 조절하며 살아갑니다.

부모의 시선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품은 채로도 다른 선택을 하는 일.

선택 앞에서 설명할 말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가족은 그렇게 우리의 선택 안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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