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담자는 ‘모르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할까?

제9화

by 그래도

1. 내담자분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계셨습니다.

저는 기록지 위에 펜을 올려둔 채,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을 더듬었습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습니다. 마치 안갯속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상담의 문은, 종종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에서 열립니다.

내담자분이 겪고 계신 고통의 전모를 알 수 없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실지도 쉽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 모르는 상태는 ‘모르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모름이 주는 불확실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불확실함은 상담자인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조용히 스며와 마음결을 흔듭니다.


2. 상담자는 대개 ‘돕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와 전문성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상태에 오래 머무르면, 무력감이 스며들고 “내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심이 따라옵니다.

내담자분이 침묵을 지키시거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실 때, 상담자는 자신이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허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허무감은 곧 ‘뭔가 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밀려옵니다.


3. 정신분석가 비온은 상담자가 지녀야 할 중요한 역량 중 하나로 '부정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을 꼽았습니다.

이는 모르는 상태, 불확실한 상태를 견디는 힘입니다.

안개 낀 새벽길을 한 걸음 앞만 보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비온은 이 기다림 속에서야 비로소 관계가 제자리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상담 장면에서 이 능력을 발휘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불안이 커질수록, 상담자는 서둘러 조언이나 해석을 내놓게 됩니다.


4. 모르는 상태가 불편해질수록, 상담자는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압박에 몰려 해결책을 꺼내고 해석을 서두르며, 결국 손에 잡히는 기술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개입은 내담자분의 속도와 경험을 따라가기보다, 상담자의 불안을 해소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상담은 내담자분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펼칠 기회를 잃고, 깊은 변화를 향한 길은 좁아집니다.


5. 모르는 상태를 견디는 것은 겉보기엔 멈춰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담자분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실 때까지, 불확실함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 자리는 상담자의 자기 성찰과 관계에 대한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내담자분 안에 이미 존재하던 힘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끝내 다 알 수 없다는 그 틈이, 어쩌면 우리가 대화를 이어가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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