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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Aug 26. 2015

우연성과 인권 1

열망으로서의 인권 ② 

장애아를 의도적으로 출산하기    

 

 2001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청각장애인 커플은 자신들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레즈비언이었으므로, 출산을 위해 청각장애인(농인)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기로 한다. 여러 노력 끝에 5대째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남성에게 정자를 기증받았다(확실한 청각장애인 유전자를 찾기 위해 분투한 셈이다). 임신 후 결국 아이를 잘 출산했고,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 고뱅을 낳았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엄청난 비난이 일었다.  어떻게 장애를 고의적으로 물려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커플은 청각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들은 고유하고 자랑스러운 농문화(Deaf culture)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많은 커플들이 자녀의 인종이나 국적, 언어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일부이자 연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출산과 양육을 재생산(reproduc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화를 주 언어로 하는 청각장애인(농인)으로서는 자신의 아이도 수화를 사용하는 농인일 경우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의 비판은, 청각장애와 같이 명백히 ‘결핍’으로 보이는 특질이 어떻게 인종, 국적, 언어를 선택하는 것과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냐는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청각장애인들은 농을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농은 하나의 문화다. 청각장애인들 가운데 수화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농문화(the Deaf culture)의 존재를 확신한다. 소리를 의사소통 수단의 핵심으로 삼는 사람들과는 달리, 손동작을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화는 언어학적으로 전혀 열등한 언어도 아니다(의사이자 인지과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책  <목소리를 보았네>를 참조하라. 한편 내 농인친구 중 한 명은 수화야 말로 우주개발 시대에 꼭 필요한 언어라고 주장한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 소리를 이용한 의사소통은 소용이 없다. 수화는 빛만 존재한다면 멀리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주에는 빛은 있으되 공기 따위는 없다).  


 이처럼 청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어렵긴 하지만, 농문화는 실제로 존재할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풍부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에 사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들을 공기로 가득 찬 지구에서 보낸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소리로 의사 소통하는 지구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면 많은 제약이 수반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같은 조건이면 청력을 가지는 편이 청력이 없는 쪽 보다 삶에서 많은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자녀에게 더 풍부한 삶의 가능성을 물려주려는 부모의 노력은 비난받지 않는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청각장애를 선택하는 부모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듯 보인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이제는 한국에서도) 소수인종은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과 차별을 당한다.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유색인종도 있지만, 대체로 유색인종의 다수는 빈곤층을 이루고 교육과 고용기회에서 제약되며 더 많은 범죄에 노출된다. 그런데 일반적인 출산이 어려운 흑인 부부가, 자신과 같은 인종의 아이를 원한 끝에 흑인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출산했다고 가정하자(이 여성은 얼마든지 백인의 정자도 기증받는 일이 가능했다고 전제한다). 백인의 정자를 기증받아 좀 더 피부색이 하얀 유색인종 아이를 낳았다면 차별과 편견에 덜 노출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여성은 흑인 아이를 ‘선택’한 셈이다.      


 이때 이 여성을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인간적 특질이 사회적으로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그러한 특질을 가진 아이를 낳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청각장애만이 문제가 될까? 가난한 흑인보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청각장애인의 삶은 훨씬 더 풍성하지 않을까? 또는 청각장애가 비록 사회적으로 불리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아이를 선택하는 점은 그 자체로 어떤 문제가 있을까?



 * 이 논의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위의 레즈비언 커플은 청각장애를 고의로 유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이 출산한 청각장애인 자녀 '고뱅'은 청각장애가 없이는 태어나지 않았을 아이이다. 즉 이들은 청력이 있는 아이를 출산하는 대신에 고뱅을 출산한 것이지, 고뱅에게 청각장애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 


 * 글이 길어 두 편으로 나누어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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