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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것은 마파두부를 먹기 위해 2,214km를 날아간 자의 이야기다.
1.
어렸을적부터 나는 마파두부를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몇번 말고는 먹어본 적도 없다. 그마저도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 짬뽕, 탕수육만 있으면 모냥이 빠지니' 메뉴판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내놓는 수준의 요리였다. 그런데도 마파두부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렜던건 애니메이션 '요리왕비룡' 때문이었다. 요리왕비룡은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요리대결물이다. 배경이 배경이다보니 중화요리를 다룬다. (지금 보면 중화요리와는 거리가 먼 음식도 많지만 그때야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봤다.) 특유의 만화적인 연출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애니메이션인데, 수십가지 요리 중에서 유독 내 뇌리에 박힌게 바로 '판다 마파두부'였다. 흰색과 검은색의 두부를 새빨간 소스에 버무려 내놓은 비주얼이 원초적 시신경을 자극했다. 특히 붉디 붉은 소스의 강렬한 맛은 혈액순환을 도와 입안 뿐만이 아니라 온몸에 생기가 돌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맛이라 카더라. 머리가 굵어진뒤 들으니 코웃음이 나는 얘기지만, 이 장면 하나로 빨간색에 집착하던 미취학 아동에게 마파두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각인되었다.
이런 만화였다. 지금보니 정말 맛없어보인다.
그래서 중국집에 갈때면 꼭 메뉴에 마파두부가 있는지 확인하고 시켜먹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마파두부가 없는걸 보면 잘만든 가게가 없었나보다. 그럴 때마다 (다 퍼먹어놓고는) 아쉽게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이 맛이 아니야'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본토의 마파두부, 입에 대본 적도 없다.) 그럴수록 '진짜' 마파두부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다. 광둥 요리와 함께 중화요리의 양대산맥인 쓰촨 요리. 요리왕비룡의 고향인 그곳에 가서 언젠가 마파두부를 먹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EBS다큐멘터리를 봤다. 쓰촨 여행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귀여운 판다도 아니요, 영웅호걸들이 잠든 삼국지 유적도 아니고 한 식당에 대한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마파두부를 개발한 식당이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건 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쓰촨=마파두부'의 공식이 성립되었다.
2.
그리하여 대망의 중국여행이 막이 올랐다. 중국 전체는 2개월이고 쓰촨은 마지막 목적지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때까지 참고 참아서 한번에 희열을 느껴야 되나, 아니면 지금도 먹고 그때도 먹어야 되나라는 선택지 사이에 놓였다. 麻婆豆腐(마파두부)라는 메뉴판 위의 네글자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결국 나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쓰촨에 가기 전까지 다섯그릇의 마파두부를 먹었다.
쑤저우에서 먹었던 마파두부. 맛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맛과는 많이 달랐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본토의 마파두부라고 그렇게 대단할건 없었다. 마파두부는 고추기름에 파, 마늘, 산초(화자오), 초피 등의 향신료의 향을 녹여낸뒤 두반장(중국식 콩 발효장. 대개 매운맛이 난다.)을 볶아 맛을 깨운 소스를 두부와 함께 끓여내는 요리다. 그런데 내가 먹은 마파두부들은 하나같이 달랐다. 맛뿐만 아니고 비주얼도 달랐다. 겉보기에도 고추기름이 선명한게 있는가 하면 두반장을 쓴건지도 모르겠는 것들도 있고 제각각이다. '맵고 짠맛의 두부요리'라는걸 빼고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보였다. 어떨 때는 밥을 한공기 더 시켰고 어떨 때는 다 못먹겠을 정도로 돼지비린내가 심했다. 어느 쪽이든 내가 그리던 맛하고는 달랐다. 완벽하지 않은 도자기는 던져서 깨버린다는 도자기 장인의 마음으로, '이 맛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다시 말하지만 본고장의 마파두부, 입에 대본 적도 없다.)
"이 맛이 아니야!"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쯤되면 '아, 내가 헛된 꿈을 꾸었구나'라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게 정상이다. 인식과 현실이 다른 인지부조화를 합리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이 그렇다. 그리고 나는 합리적이지 않았다. 내 환상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먹은 마파두부들을 틀린 존재로 규정했다. 먹어본 적도 없는 마파두부의 이데아를 향한 나의 집착은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을 찾아나서는 모험가, 혹은 불로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진시황과 같았다.
3.
쓰촨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식당에 대한 정보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정부가 구글과 네이버(블로그, 카페)를 차단해놔서 쓸 수 있는 검색엔진이 중국사이트인 바이두 밖에 없다. 영어로 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중국어로 검색해야 그나마 쓸만한 정보들이 나온다. 내 중국어는 짧았다. 몇번 검색해보다 높은 언어의 장벽만 느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덕분일까, 돌파구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됐다. 리탕(理塘)의 한 호스텔에서 쓰촨성 론리플래닛을 찾았다. 물론 중국어판이다. 가끔 나오는 아는 한자와 지도만 더듬더듬 읽다가 麻婆豆腐라는 네글자에 시선이 고정됐다. 마파두부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짧은 중국어로는 잘 읽히지 않는다.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사전을 끼고 낑낑대며 읽었다. 끝끝내 이해가 안되는 두 문장은 상하이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에게 SOS를 보냈다. 마침내 해당 식당의 이름이 진마파두부(陈麻婆豆腐)라는걸 알아냈다. 지도에 검색해보니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만 12개의 지점이 나온다. 본점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론리플래닛에서 도보여행 코스로 함께 제시됐었던걸 감안해 하나의 지점을 선택했다.
중국어판 론리플래닛에서 발견한 정보. 이 한 단락을 읽는데 30분이 걸렸다.
4.
청두에 도착한 첫째날 저녁을 그곳에서 먹기로 계획했다. 먼저 낮에는 판다를 본다. 약 다섯시쯤부터 론리플래닛에 나와있는 도보여행 코스를 밟아 지점까지 걸으면 7km다. 구경하는 시간까지 약 세시간을 걸어 허기진 위장을 끌어안고 가게에 입성한다. 늦은 저녁이라 번잡하지 않은 가게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마친다. 완벽한 계획이다. 당일에도 완벽하다. 계획한 시간에서 한치의 틀어짐도 없이 착착 진행된다. 하긴 판다를 보면서도 사람들을 구경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마파두부 생각밖에 없었으니 당연하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두부에 설렐 줄은 몰랐다.
가게 외관이 세련되다. (이미지 출처: earthsourcefood.com.au)
2층짜리 가게 입구는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그 간판과 같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들어가니 잘 꾸며진 내부가 반겨준다. 원조집이라는 타이틀에는 맞지 않은 세련됨이지만 종업원들의 유니폼도 그렇고, 전통의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잘 살려낸 감각이 엿보인다. 원조집에 걸맞게 메뉴의 맨 앞에는 아예 마파두부가 별도로 분류돼있다. 매우 훌륭한 가게다. 마파두부, 딴딴면, 밥, 사이다를 시켰다. 여태까지 살아왔던 그 어떤 날도 음식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이토록 충만하지는 않았다. 데이트하는 날 약속장소에서 상대방을 기다리던게 이런 느낌이었던게 생각난다.
5.
한국에서는 마파두부가 많이 알려져 있어 대표적인 중국요리로 취급받지만 사실 마파두부의 역사는 길지 않다. 19세기, 즉 청나라 말기에나 개발된 음식이다. 마파두부의 원래 이름은 진마파두부(陈麻婆豆腐)였다. 옛날 청두에 진씨 성을 가진 노파가 살았다. 그녀는 어렸을적 천연두를 앓았기 때문에 얼굴에 곰보자국이 많았다. 남편이 마차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자 그녀는 생계의 수단을 찾아야 했다. 당시 청두에는 유채 기름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팔리지 않은 기름을 그녀에게 넘겼다. 기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고민하던 노파는 역시 쉽게 구할 수 있던 두부와 함께 요리했고, 부족한 맛은 쓰촨의 두반장과 향신료를 통하여 채웠다.
이 요리가 쓰촨 사람들의 입맛에 맞아 쓰촨 지방에서는 금새 유명세를 탔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중국 국민당이 수도를 난징에서 청두에 가까운 충칭으로 옮기자 마파두부는 쓰촨 이외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에게도 유명해진다. 국민당이 수도를 다시 난징으로 옮기고, 더 지나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축출함에 따라 많은 중국 요리사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마파두부의 이름도 그렇게 세계에 알려졌다. 원래 진(陈)씨 곰보(麻)할머니(婆)의 두부(豆腐)라는 뜻이었던 이름은 발음의 용이성을 위해 마파두부라고 불렸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마(麻)가 마라샹궈 등의 음식에서 말하는 얼얼한 맛을 뜻한다고 알고 있지만, 이름의 유래를 떠올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
진마파두부. 비주얼부터 완전히 나를 매료시켰다.
음식이 나왔다. 비주얼부터 '이건 진짜다'라는 직감이 온다. 지옥에서 온듯한 붉은색이 그릇에 가득하다. 흥건한 고추기름이 선명한 윤기를 자랑한다. 온도가 중요한 음식이기에 펄펄 끓인 요리는 뜨거운 뚝배기에 담겨져 나온다. 압도적이다. 20년 만에야 드디어 만난 연인을 대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어 맛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