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여행 오니까 너무 좋다. 이렇게 좋은걸 여지껏 모르다가 우리 딸 덕분에 이제서야 알게 됐네."
엄마가 말했다. 바르샤바의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고기를 썰고 있었다. 폴란드에 도착한 이후로 엄마 입에 찰싹 붙어있는 말이다.
"그럼, 여행은 자유여행이지. 그러니까 엄마도 이제 자주 다녀."
한두번 듣는 얘기가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엄마의 입가에 어린 멋쩍은 웃음의 의미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엄마는 쇼팽을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중학생 때부터 좋아했으니 인생의 절반도 넘게 사랑해왔다. 소파에 앉은 엄마와 함께 배경으로 깔리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우리집의 익숙한 전경이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수백번도 넘게 들어온 그 음악은 이제 곡을 외워버릴 지경이다.
엄마는 언젠간 쇼팽이 태어난 땅을 밟아보고 싶다고 꿈을 꿨다. 그 당시엔 문자 그대로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냉전해체와 우리정부의 북방외교가 맞물려 수교야 맺었다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어찌 한때나마 공산국가였던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89년부터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었으나 여전히 해외여행, 심지어 동구권 여행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게 안되겠거니 마음에 묻어뒀던 꿈을 이룬 순간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50이 넘은 나이에서야 딸과 함께 우상의 나라의 땅을 밟은 엄마는 공항을 나서며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쳤다. 환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은, 내가 앨범 속에서 봤던 싱그러운 소녀를 닮아있었다.
이제는 엄마의 멋쩍은 미소의 의미를 안다. 엄마는 해외여행을 몰랐던게 아니라 못했던 것이고, 여전히 자유여행은 엄마 혼자서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매번 딸의 여행에 붙어 다닐 수는 없으니 멋쩍은 미소만 지은게다. "엄마도 자주 다녀"가 아니라 "나랑 같이 가면 되지"라고 대답했어야 됐는데.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
쓰다보니 엄마 생각이 난다.
전화기를 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나랑 자유여행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