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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맛없다.
1.
정확히는 맛은 있는데 산초 때문에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첫입에 매운맛과 기름맛이 짜릿하게 올라오지만 금방 따라오는 얼얼함에 미각이 마비된다. 먹다보면 얼얼하다 못해 입안이 고통스럽다. 쓰촨 사람들은 향신료, 그 중에서도 산초에 열광한다. 속된 말로 '환장한다'. 오죽하면 산초의 영어이름도 쓰촨페퍼(sichuan pepper)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파는 빵에도 산초를 넣는다. 매운맛이 필요없는 곳에도 넣는데 마파두부에는 오죽할까. 첫입에 도저히 안될것 같아 산초를 하나하나 골라낸다. 통으로 들어간 산초만 한숟가락 가득 나온다. 다 골라냈다고 생각하고 먹으면 어느덧 또 산초가 씹힌다. 간 돼지고기랑 섞여있어 돼지고기인줄 알았다. 입안에서 산초 폭탄이 터진다. 한두번은 버틸만 하지만 그 이상 씹어버리는 순간 당신의 미각은 증발한다. 그게 쓰촨의 맛이라는데, 미안하다. 내 입맛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설렘이 좌절, 그리고 분노로 변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본토의 얼얼함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원망하다 이내 애꿎은 요리사를 탓한다. 산초만 없으면, 아니 조금만 덜 넣었어도 괜찮을 요리에 왜 산초를 쏟아넣어 나의 환상을 망친걸까. 왜 자신을 낳고 제갈량도 낳았냐며 하늘을 원망하던 주유와 같은 심정으로, 왜 하늘은 마파두부를 만들고 산초를 넣었는가라며 좌절했다. 아직 반의 반도 못먹었지만 차마 숟가락을 들 수가 없다. 어거지로 먹으면 입안이 저릿저릿하게 아프다. 차마 포기하지 못해 젓가락으로 두부만 집어먹는다. 당연히 맛이 흐리멍텅하다.
"하늘은 왜 마파두부를 낳고 산초를 넣었는가!"(출처: 만화 삼국지, 요코야마 미쓰테루 作)
결국 다 먹지 못하고 계산서를 집어 터덜터덜 카운터로 향했다. 여기가 가장 오래된 가게 맞냐고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원조 맞는데 실패한거니 더 슬프다. 어릴적부터 산타클로스를 믿진 않았지만, '울면 안돼'라는 훈계가 몽땅 공갈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어린이의 마음이 이와 같겠구나 싶다. '가슴을 베인 것 같은' 헛헛함을 달래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마파두부'를 찾는데 도움을 줬던 친구에게 위챗(중국 카카오톡)을 보냈다. 친구는 위로의 말로 다른 가게도 시도해보란다.
합리적인 사고라면 그게 맞다. 원조는 처음 시작했다는 말이지 가장 맛있다는 말이 아니다. 삼O라면이 그렇지 않은가. 맛있는 식사를 위해서라면 다른 맛집에 가서 다시 시도해보는게 맞다. 하지만 이건 마파두부를 먹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꿈을 찾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도 실패도 모두 진마파두부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색이 바랜다.
위로는 고맙지만, 나의 정답은 아니다.
2.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 할일이 정해졌다.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무함마드가 이랬을까. 나는 내일 새벽 비행기로 인도로 떠난다. 2개월 간의 중국여행, 그 마지막 식사를 위해 다시 진마파두부에 갈 것이다. 이 때문에 놓치게 될 관광지가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점심은 어제 빵집에서 샀던 빵 조금과 밀크티로 때운다. 위장이 시위를 하지만 협상할 생각은 없다.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할 수 있는건 모두 한다.
저녁 6시, 마지막 기회다. 배수진을 친 한신의 마음으로 비장하게 식당에 입장한다. 중국의 일부식당은 종이메뉴판에 먹고 싶은 메뉴를 체크하여 제출하는 방식으로 주문을 받는다. 주문서에 '不要花椒(산초 빼주세요)'라고 적었다. 혹시라도 점원이 놓칠까봐 주문을 하면서 두번, 세번을 강조했다. '산초를 빼면 무슨 맛으로 먹지?'라는 의미인지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주문은 정상적으로 들어갔다. 마파두부, 만두, 밥을 시켰다. 입맛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음료는 뺐다.
"산초 빼주세요." 마지막 기회를 날릴 수 없다는 절박함을 담아 꾹꾹 눌러썼다.
경건하게 기다린다. 만두가 먼저 나온다. 잘 삶은 물만두에 달콤함을 더한 간마늘 간장이 얹어져있다. 간마늘을 이렇게 얹은 요리는 중국에선 처음본다. 역시 쓰촨이다. 소스의 냄새가 환상적이라 뱃속은 더 요동친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마파두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나왔다. 어제랑 똑같이 산초가 무더기로 얹어져있다.
3.
한국과 쓰촨의 마파두부에는 두가지 차이점이 있다. (정확히는 한국과 진마파두부의 차이다. 마파두부의 조리법은 중국 내에서도 가게마다 다르다.) 먼저 한국의 마파두부는 통 산초를 쓰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마(麻)'한 맛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예 산초를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령 쓰더라도 처음 기름을 두르고 산초를 볶아내 향만 뽑아내지, 완성할 때까지 산초를 통으로 두는 경우는 없다. 대신 대파 혹은 쪽파 등의 향신채로 향을 보완한다. 물론 쓰촨엔 그런거 없다. 산초를 통으로 넣는다. 향을 냈다고 걸러내지도 않는다. 그대로 먹는다. 심지어 중국산초는 한국산초보다 얼얼한 맛이 강하다. 과연 대륙의 기상이다.
두번째는 기름의 활용이다. 한국의 마파두부에서 기름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다. 처음 향신료의 향을 녹여내는 역할, 조리 마지막에 불을 끄고는 고추기름이나 참기름을 한번 둘러서 기름맛을 더하는 정도다. 기름을 적게 쓰다보니 뻑뻑할 수 있어 물을 부어 끓인다. 부족한 점성은 전분물을 통해 해결한다. 쓰촨은 물 대신 기름을 쓴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진씨 노파가 개발할 때부터 '이 많은 유채기름을 어디다 쓰지?'라고 고민했던 음식이다. 기름을 아끼지 않는다. 불과 기름의 예술이라는 중국음식 중에서도 기름을 많이 쓰는 편이다.
진마파두부(좌)와 한국식 마파두부(우). 진마파두부 위에 올라와있는 짙은 덩어리가 산초다. 한국식 마파두부는 한눈에 보기에도 점성이 있다. (우측 출처: 유튜버 '맛상무')
4.
다행히도 산초가 무더기인 마파두부는 다른 테이블의 음식이었다. 잘못 나온 마파두부는 가져가고 내가 주문한게 나왔다. 척 보기에도 비주얼이 다르다. 군데군데 산초가 보이지만 어제 봤던 것에 비하면 덜 위협적이다. 쓰촨의 요리사는 차마 산초를 포기할 수 없었나보다. 마지막 기회이니만큼 몇없는 산초도 집어내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산초를 뺀 진마파두부. 그래도 간간이 보인다.
맛있다.
완벽하다. 혀끝에 닫자마자 불을 당기는듯한 기세로 매운맛이 입안을 감돈다. 날카롭게 찌릿하며 들어오는 매운맛이 아니다. 기름을 통해서 전달되는 매운맛이기 때문에 매우 묵직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위에 있던 기름이 뚝배기에 담겨서 나오니 음식이 열을 가득 품고 있다. 풍부한 기름이 주는 지방의 맛과 향신채가 선사하는 매운 맛이 몸 전체를 데운다. 몸이 으슬으슬할때 먹으면 제격이다. 두부는 혀에 닿기만 해도 몽글몽글 부드럽게 부서진다. 뭐 하나 부족한 요소가 없다.
첫입을 먹자마자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내가 이걸 먹으러 여기까지 온거구나' 싶었다. 어제의 실패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숟가락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양념과 뜨거운 기름을 숟가락 가득 떠서 밥에 비벼먹고 만두에 끼얹어 먹는다. 간이 센 음식이기 때문에 절반도 먹기 전에 밥을 다 먹었다. 한공기 더 시켰다. 금새 비웠다.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숟가락질이었다. 그렇게 한 뚝배기를 다 비우고 나니 입안과 입술이 기름으로 번들거린다. 기본으로 나온 차로 입을 씻어 식사를 마쳤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며 점원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연 가게인가요?"
"1862년부터에요." 영수증에 1862년이라고 적어준다. 이 자리 이 건물에서 150년 넘게 영업을 한건 아니지만 그 긴 역사를 함께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가게 간판 앞에서 '1862년'이라고 적힌 영수증을 들고 사진을 찍는다. 밥 한끼에 여행이 행복하다.
식당 인증샷은 처음 찍어봤다.
5.
이렇게 쓰고나서 말하니 이상하지만, 사실 나는 음식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는다. 요리는 좋지만 음식을 먹는것 자체가 좋지는 않다. 요리는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중의 하나다. 그래서 남의 나라 주방을 구경하는건 좋아하지만 식당 앞에 줄서서 기다리는걸 좋아하진 않는다. 먹는걸로 이렇게 글을 써본 것도 처음이다. 글을 쓰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파두부가 뭐라고 이렇게 긴 글을 쓰는가.
마파두부는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딱 마파두부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났어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아니다. 분명히 음식 하나에 이렇게까지 행복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한끼의 식사가 나를 울게도 웃게도 만들었던 이유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위에 쌓아올린 이야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추억이 되고 취향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를 공유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겐 이 글이 '마파두부 하나 먹고 난리부르스를 추는' 유난이 된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조치훈 9단이 남긴 말이다. 바둑을 보지 않는 자에게 바둑은 그저 돌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바둑기사마저 '이까짓게 뭐라고'라는 말을 뱉는다. 누군가가 공감하고 알아주지 않는다면 더더욱 외롭다. 그래도 다시 바둑판 앞에 앉는다. 결국 이게 나의 삶이고 길이니까.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출처: 웹툰 '미생')
내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마파두부를 먹었다고 해서 변하는건 없다. 변한 것은 오직 나의 세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이기 때문에 세계는 또 다시 한뼘 늘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마파두부'는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특별하다'는 의미는,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의미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이 글은 마파두부를 먹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