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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세계여행 Mar 16. 2020

코로나가 쏘아올린 인종차별

인종차별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자세

※ 저는 지난주까지 중동과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모로코를 여행했습니다. 여행기는 순서대로 올리는게 원칙이지만, 이번 글은 코로나 사태의 시의성을 고려했을때 먼저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가 얼른 쓰고 싶어서 그래요.




※ 라이킷과 구독, 그리고 댓글을 부탁드려요 ! 독자와의 만남이 작가에겐 가장 큰 행복입니다.



Q. 다음중 인종차별을 당했을때 당신의 대응은?

1. 못 배워먹은 짓이니까 무시한다.
2.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뜬다.
3. 죽일듯이 노려보며 쌍욕을 한다.



1.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예매했다.

 사하라 사막을 보고 싶다. 스페인까지 왔는데 안 들르고 가면 언제 또 오겠나 싶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는데, 최근 다녀온 여행자들이 인종차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원래도 있었는데 코로나가 기름을 부었다. 유럽하고 남미를 일주한 프로 여행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래도 '사하라 사막을 순례하는데 이 정도 박해는 짊어지고 가리라'라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사하라 사막의 순례자




2.

 사실 이전까진 인종차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경험한건 단 두번이었고, 그마저도 은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뭘 물어봐도 못들은척 하거나, 유럽인과 똑같이 서비스를 요구해도 눈에 띄게 불친절하게 응대하는 정도다. 본인들도 자신의 행동이 '못 배워먹은짓'이란걸 알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나도 크게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대충 넘겼다. 애초에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종밖에 내세울게 없는 저학력 하층민이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에 백인 빈곤층이 표를 던진 이유다.


 그런데 모로코에선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그럴수가 없다. 여행 초반엔 괜찮았지만 대도시에 가니 말도 안되게 심하다. 하루에 일곱여덟번씩 길거리에서 '코로나' 소리를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다이어트 중인데 굳이 보란듯이 내 앞에서 치킨먹방을 찍는 동생을 사랑하는 것보다 힘들다. 한두번은 그냥 넘겼는데 며칠씩 쌓인다. 오죽하면 기념품 가게 양반이 '아이 러브 코로나!'라면서 호객을 한다.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신고 있던 양말을 입에다 물려버리고 싶다.



3.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도로변을 걷고 있었다. 옆을 지나가는 차량의 창문이 열리더니 중학생쯤 돼보이는 '코로나! 코로나!'라고 소리친다. 달리는 차를 잡을 수는 없으니 그냥 넘기려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유럽에서 터졌어도 얘네가 이랬을까?


 아니다. '동양인은 소심하고 화를 낼줄 모른다'는 선입견 때문에 만만하게 보는거다. '동양인 여자는 화를 내지 않으니 성희롱을 해도 된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어디 갈리 없다. 실제로 모로코의 코로나 확진자는 이탈리아에서 감염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탈리아인에게 코로나 소리를 하진 않는다.


 생각이 바뀌었다. 한명만 걸려라 싶어 이를 갈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얌전히 바다를 보고 있는데 코로나 소리가 들린다. 20대 아랍여자다. 내가 쳐다보니 비웃기까지 한다. 그대로 쳐다봤다. 두번째 눈이 마주치니 흠칫한다. 죽일듯이 노려보며 다가갔다. 지갑 훔치려다 들킨 소매치기마냥 부리나케 도망친다. 2인조였는데 코로나 소리를 한 여자는 도망치고, 친구는 자기는 아니라며 도망치는 여자를 가리킨다. 도망치는 꼴이 우스워 비웃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모로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둘다 빵 터졌다. 하이파이브를 하고 갈길 갔다.



 그 후로 코로나 소리하는 것들을 모조리 잡아족쳤다. 남녀노소할것 없다. 다섯살배기부터 중년 남자까지 가지각색이다. 나라꼴 잘 굴러간다. 한번은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묻지도 않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엥겨 붙는다. 무시하고 걸었다. (모로코에서 모르는 사람이 길을 알려줄 경우 1/3은 순수하게 착한 사람, 1/3은 일부러 길을 잘못 알려줘 골탕먹이거나 영업을 하려는 사람, 나머지는 길을 알려주고 팁을 받아먹으려는 사람이다. 무시하는게 상책이다.) 내가 무시하니 나를 앞질러가며 '코로나' 소리를 한다. 쫓아가서 어깨를 잡아 세웠다.


"뭐라고 했냐? 다시 말해봐."


 긴장한 표정이다. 무시하고 가려는걸 계속 쫓아가 쌍욕을 하니 그제서야 변명을 늘어놓는다. 모로코 전통모자의 이름이 코로나라나 뭐라나. 궁색하기 그지없다. 초등학교 3학년인 우리 조카가 지어내도 이거보단 낫겠다. 사실확인도 필요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일 뿐더러 찔리는게 있는 인간은 얼굴에서 티가 난다. 막다른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슬금슬금 도망칠 궁리를 하는게 눈에 보인다. 나와 벽 사이에 낑겨서 지나가려는 것까지 막진 않았다. 끝까지 사과를 하진 않았지만 좁은 골목에서 낡은 자전거를 타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꼴이 우습다.




4.

 화를 내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는데, 뻥이다. 못들은척하며 지나칠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 뭣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자리를 피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성범죄 피해자가 숨어다닐 이유가 없듯 외국인이라고 부당한 대우도 참아넘겨야할 이유는 없다. 참는게 이기는게 아니다. 참으면 병이다. 


 내 얼굴은 특별히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이 평범하거나 밋밋한 편이다. 게다가 아랍인은 물론 한국인들과 비교해도 체구가 마른 편이다. 화를 낸적이 많지 않아 화를 잘 내지도, 욕을 찰지게 하지도 못한다. 이런 내가 화를 내자마자 놀라서 도망치는걸 보면 그들에게 '동양인이 화를 낸다'는게 얼마나 예상 밖의 일이었던걸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공포로부터 나온다.


 드라마 '송곳'의 대사다. 화를 안내는건 마음이 넓은 거지만 화를 못내는건 나약하고 비겁한거다. 나약하고 비겁한 자를 존중할 사람은 없다. 나는 화를 낼줄 몰랐고, 그래서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존중을 받지 못했었다.



5.

 이 얘기를 들은 지인들은 '여행 때문에 성격나빠지는거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짜증은 내도 화는 거의 내지 않던 애가 사람을 쫓아가며 쌍욕을 하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해외에서 용감하기도 하다'는 소리도 있었다. 용기가 있어서 용감한 행동을 하는게 아니라, 용감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용기가 있는거다. 물론 나도 겁났다. '얘네가 친구 불러오면 어떡하지', '싸움나서 경찰서 가면 분명 내가 불리할텐데'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무게까지 짊어지고 일어나서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이게 나를 지켜낼수 있는 방법이라면, 성격정도야 얼마든지 버리겠다.





※ 예고

 매거진 <그리다 세계여행>의 다음 글은 "코로나 공포 속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이에요.
 세계각국이 국경을 폐쇄하는 코로나 광풍속 여행자의 고난을 담습니다.

 '인증샷 관광'이 아닌 '생각하는 여행'을 지향하신다면 <그리다 세계여행>을 구독해주세요!


※ 이미지 출처(출처 생략시 직접 촬영)

1. 썸네일 :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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