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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dy Jan 06. 2021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정의(正義)가 정의(廷議)되기까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 대학교가 영국의 법학교수 필립 샌즈에게 강연을 부탁했다.

리비우. 렘베르크, 로보프, 리보프, 리비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그곳은 필립 샌즈의 외할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했다. 또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이 책의 원어 제목이 바로 'On the Origin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이다)라는 개념을 고안한 두 학자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 매료된 저자는 도시 자체를 되짚기도 하고, 외할아버지와 두 학자의 가계와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가족과 친척이 가지고 있던 사진 등의 자료를 엮는 한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쓰인 국제법의 개념들을 끌어와 글을 써 나간다. 미시와 거시가 카메라로 줌인, 줌아웃하며 춤추듯 풀어진다.


여기서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하는데 히틀러의 변호사인 한스 프랑크다. 필립 샌즈는 한스 프랑크의 아들까지 만나 취재를 마쳤다. 책의 마지막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진 한 장이 등장한다. 그것을 보여준 이가 바로 한스 프랑크의 아들인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사형제도에 반대합니다. 다만 제 아버지 경우만 제외하고요. 그는 범죄자였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은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반인륜 범죄가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될 때 구체적으로 어떠한 법 조항으로 가시화됐는지를 다뤘다. 실제 책에선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것이 고안될 당시부터 전혀 다른 개념이었음이 두 학자의 인생에서부터 뉘른베르크 재판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에 걸쳐 펼쳐진다.


이렇게만 얘기한다면 이 책을 매우 딱딱한 국제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독자들에게도 또 이 책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거시와 미시, 전문지식과 일반인의 삶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가기 때문에 책 자체를 읽어 내려가는 매력도 대단하다. (사뮤엘 존슨 상이라고 알려져 있던 영국의 발리 기포드 논픽션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쓰인 책이기도 하다. 2016년 필립 샌즈가 수상할 당시 경쟁작은 노벨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Secondhand Time: The Last of the Soviets>였다고 한다.)



그들은 플랫폼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 줄을 서서 강제로 옷을 모두 벗어야 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유대인 노동자들은 그들이 벗은 옷을 모아 막사로 옮겼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따라 알몸 상태로 걸어서 수용소에 들어갔다. 이발사가 여자들의 머리를 밀었으며, 그 머리카락은 묶음으로 포장되어 매트리스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나는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주 적은 수의 생존자 가운데 사람들의 머리를 잘랐던 이발사 아브라함 봄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봄바는 대답을 거부했지만 란츠만은 계속 요구했다. 결국 이발사는 주저앉아 울면서 여자들의 머리를 밀었던 일을 설명했다. “나는 죽을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만 생각했어요.”
란츠만은 트레블링카 수용소 방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이 죽음의 수용소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순간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머리를 미는 일, 발가벗고 걷는 일, 가스. 말케의 삶은 열차에서 내린 뒤 15분 만에 끝이 났다.

p.91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10 명을 죽였고 그들이 우연히 같은 집단의 사람이라고 해봅시다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은 리비우에 살고 있는 유대인 또는 폴란드인입니다. 라우터파하트 교수는 체계적인 계획의 일부개인을 죽이는 것은 인도에 반하는 죄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렘킨의 경우에는 해당 집단을 파괴할 목적으로 다수를 죽이는 제노사이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늘날 검찰의 입장에서는  둘의 차이를 의도가 있는지의 여부로 판단합니다. 제노사이드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살인의 행위가 집단을 파괴하려는 의도에서 자행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반면 인도에 반하는 죄는 그런 의도를 밝힐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제노사이드에 개입한 사람들이 흔적이나 도움이  만한 서류 등을 남기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집단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증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덧붙여 설명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차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다. 법이 당신을 보호하려는 이유가 당신이 개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이 우연히 소속된 집단이 말살의 대상이기 때문인지가 중요한가?  질문이 강의실에 여운을 남겼고 나는 강연 이후 계속해서  질문을 생각했다.

p. 34-35


1945~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선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스 프랑크에 대한 선고에서 ‘기꺼이 알면서’라는 표현이 쓰였고,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에 관해 유죄’라는 판시가 있었지만(p.537) 말이다. 앞서 언급한 두 학자 가운데 인도에 반하는 죄를 이야기한 라우터파하트의 주장은 재판의 결과에 따라 국제법의 일부가 됐고, 제노사이드를 주장한 렘킨은 실망했다.(p.541) 제노사이드 범죄에 대한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피고인은 르완다 학살 주범으로 지목된  장 폴 아카에쥬(아카예수)였고 때는 1998년 9월이었다.(p550)




법이 곧 정의(正義)는 아니지만, 불의를 정의(廷議)할 법을 만들고 더 나아가 그 법에 따라 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불의를 정의할지, 정의를 바로 세울지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며 그 과정을 오롯이 수행할 때 미래 세대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실수가, 희생이, 투쟁이, 녹아 있으며 인류의 지혜로 쌓여감을 이 책은 말해준다.


*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East West Street: On the Origins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 (필립 샌즈, 정철승, 황문주 옮김, 더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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