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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dy Jan 15. 2021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모두에게 이런 주치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추혜인, 심플라이프)



직업인이라면 유능함을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 비행기 조종사라면 자신이 태운 승객과 화물을 탈없이 목적지까지 운반해야 하며, 판사라면 법정까지 오게된 이들의 사연을 제대로 알고, 법에 따라 정당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직업을 소명(call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일이든 제대로 직업을 행하는 것의 숭고함과 연관돼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가정의학과 추혜인 선생님은 바른 ‘직업인’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 같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 분이고 책으로만 만나본 결과다.) ‘좋은 사람’이 반드시 ‘능력있는 직업인’이 아닐지는 몰라도, ‘바른 직업인’은 ‘좋은 사람’일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만난 의사 추혜인이 그랬다.  


 '사람’을 본다.


나는 수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난다. 트랜스젠더는 정신 질환의 세계적인 진단 기준이 되는 미국정신의학회의 진단 및 통계편람 최신판에서 이미 삭제되었다. 대신 법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자기 스스로가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성별이 다른 데서 오는 '위화감'을 줄여,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학의 역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정의에 따라, 그(녀)들이 좀 더 건강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죽을 때 여자로 죽고 싶다는 소원도 꼭 들어드리고 싶다.
p.18


이번에는 한숨 대신 쿨하게 웃었다. 아픔에 공감을 해주는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증의 이유를 찾아내 이름 붙이는 건, 그래서 환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건 오직 의료인만이 할 수 있다. 통증에 단순한 공감을 넘어서는 ‘적절한 진단적 공감’이 필요한 때가 있다.
 p.202


‘페미니즘’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편견을 깬다.


예전에 영화나 소설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자주 걸리는 암은 따로 있었다. 백혈병이나 뇌종양 같은 것. 수술 후 설사와 방귀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대장암이나 ‘여성성’이 심하게 훼손된 것처럼 간주되는 유방암, 담배와 묘하게 연결되는 폐암 그런 거 말고, 순수하고 우아하고 애틋해 보이는 백혈병 같은 암이나 깡마르고 창백해지는 결핵 같은 질환들이 주로 여주인공의 인생에 끼어들곤 했다. 여자들은 병을 앓는 순간에도 ‘여성성’을 잃지 않도록 영화나 소설 속에서 그려졌다. 암 투병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의 현장인데, 어떤 암을 앓을지 지정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력을 박탈당하고 초상화처럼 박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주인공의 이미지들이 실제 투병 중인 여성들에게 자기 신체 이미지에 대한 훼손으로 작용하고, 생리적인 현상들을 잘 호소하지 못하게 하는 굴레로도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성은 심지어 아플 때조차 여성스럽게 아파야 한다니!
나는 엄마가 겪고 계셨던 대장 절제의 합병증을, 특히나 배설과 관련한 생리적인 이야기들을 이토록 솔직하고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그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딸과 엄마 사이라서 행운이었다.
p.184~185


나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누구에게라도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말. 친근하고 헌신적인 돌봄은 항상 ‘딸, 며느리, 아내, 어머니’처럼 여성의 형태를 취해야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이 표현들의 자연스러움에 취하는 순간, 돌보는 당사자인 그 여성들의 고립감은 더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돌봄이 실제로는 노동이며, 이 노동이 어느 계충, 어느 성별의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는지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독박 노동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에 무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동네에서 만들고자 하는 돌봄의 생태계는 이런 자연스러움의 함정을 의심하는, 평등하고 호혜적인 돌봄이어야 한다.
p.148~149


공동체를 꿈꾼다.


여성주의 의료기관은 여성들만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성별, 성별 정체성, 직업, 계급, 인종, 나이, 학력 등에 관계없이 차별 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이다.
진료실 안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지식 차이로 인한 권력 치이가 생기지 않게, 환자가 자신의 몸에 대한 충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의사가 적절한 조언자이자 동료로 관계를 맺는 곳이다.
여성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 무시당하지 않는 곳이다. 직원들도 누구나 존중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이상적인 의료기관’은 당연히 나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료협동조합을, 그것도 여성주의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처음엔 페미니스트들을, 그리고 서울 은평구에 자리 잡은 후엔 주민들을. 준비 기간부터 하면 10년 이상을 해온 지금,그래서 ‘이상적인 의료기관이 되었느냐 하면, 그건 직접 와서 경험해보시라.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도 좋다. 아니, 완성형이 아니라서 좋다. 새로운 조합원, 직원의 들고남과 함께 매일 달라질 수 있는 조직이 의료협동조합이니까.
p.287


오늘도 가방을 걸고,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나갈 저자의 에필로그에는 자신의 사주 이야기가 나온다. “재미있게 살려면 응급의학과를 하고, 주변 사람들을 도우려면 가정의학과를 하라고 했던 사주 풀이”(p.332)

그의 동네, 그의 환자들, 그의 사람들이 함께 펼쳐낼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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