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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린 Aug 02. 2022

나를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어제 덕수궁에 갔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가서 만날 사람도 굳이 보려고 한 것도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나는 요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즐겨 보고 있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박은빈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보기 시작했다. 덕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영우만으로 부족했던 나는 그의 과거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다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를 찾았다. 여기서 은빈님은 늦은 나이에 바이올린을 전공하여 미래에 대해 고민 중인 스물아홉 살 캐릭터를 연기한다.


어제 아침에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보고 있었는데 거기서 남주인공이 연락이 안 되어서 찾으러 가보니 고궁을 구경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내일 비도 오는데 오늘 고궁을 보러 가볼까 생각했다. 만약 간다면 어디로? 경복궁은 너무 많이 가 봤고 창덕궁은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러면 덕수궁으로? 그리고 나는 티비를 끄고 냅다 옷을 입고 나갔다. 그게 덕수궁을 가게 된 사연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대책 없이 살 수 있나 싶겠지만 이런 일이 나에게는 일상이다. 그저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살아온 사람이라서 익숙하다. 내 친구들도 웬만하면 적응한 것 같다. 내키는 대로만 살다 보니 내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나 싶기도 하지만.



가이드에게 덕수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덕수궁은 원래 궁으로 쓰던 공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2층으로 된 석어당과 관련된 선조-광해군의 이야기, 열심히 만들었으나 1910년에서야 완공되어서 제대로 쓰이지 못했던 석조전의 이야기. 고궁을 보러 가면 꼭 가이드의 해설을 들을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건물이 오랜 세월 속에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이드의 해설을 따라 조금씩 건물에 귀를 기울여 보면 시간을 넘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는다.


가이드 해설이 끝나고 혼자서 조용히 덕수궁을 거닐다가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중화전을 바라 보았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오붓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보였다. 수많은 차와 사람이 오고 가는 도심 한복판에 시간이 멈춘 듯이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책을 읽으며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렀다. 흐려서 너무 쨍쨍하지 않은 날에 덕수궁에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 퍽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계속 된다면 인생도 꽤나 살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들에게 술자리에서 한 번쯤 해본 이야기가 있다. ‘서른자결(?)설’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인생을 서른까지 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서른이 되면 깔끔하게 인생을 정리하자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대부분 내가 어디 아프거나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닐까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짓거나 다소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은 마흔까지 열심히 살다가 그 이후로 잠적해서 도를 닦는 것이었다. 나는 늘 이 세상으로부터 언젠가는 도망가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며 살아왔다. 이 세상은 좋은 부분도 많지만 나쁜 부분도 많아서 나를 괴롭게 하니까 할 만큼 열심히 살다가 도망쳐야지 하는 결심. 물론 결심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서른자결설은 그것의 과격한 버전이었을 뿐이다.


중2병 냄새 풀풀 풍기는 생각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고작 30년 살고 인생이 살 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잘 살자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변화는 어떤 거대한 사건이나 사람에서 오지 않았다. 갑자기 어떤 사람 때문에 세상이 밝게 보였다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작은 일상의 순간이 조금씩 내 마음을 움직였다.


저녁에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가 너무 맛있을 때, 지난 주 영화관에서 본 ‘헤어질 결심’이 너무 좋아서 또 보고 싶을 때, 동네 친구랑 맥주를 마시며 깔깔 떠들 때, 그리고 어제처럼 고궁에서 멍하니 감상에 젖을 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일상을 음미하는 찰나의 순간 ‘인생이 살 만하다’ 생각한다.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은 기어코 살아서 무언가 해내겠다는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맛있게 먹은 미역국 한 그릇일 수 있음을 덕수궁을 보면서 생각했다.


일상의 작은 조각을 따라가다 만날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이 어제 만난 덕수궁의 모습 같다면 좋겠다. 아름다운 덕수궁의 모습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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