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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린 Mar 25. 2022

아버지와 전등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세상만사 남의 일은 잘 아는 듯해도, 정작 가까이 있는 가족은 어떤 삶을 사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랬다. 나는 몇 년 전까지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몰랐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가령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때, 아버지가 입을 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말씀을 하시는 경우라면, 가끔 어머니가 당신이 만든 반찬이 맛있느냐며 집요하게 물어볼 때나 가족이 모두 알아야 할 일 - 대개 명절이나 경조사 이야기다 - 을 논의할 때 정도다. 그 외엔 전자기기 다루는 법이나 연말정산처럼 아버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나 내 방에 찾아와 대화하는 경우나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다. 


둘째, 나와 아버지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집에서 좀체 않는 편이다. 좋은 삶을 위해서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업무가 집에서까지 이어진다면 매우 힘들 것이다. 물론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나와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어머니와 형은 그런 편이지만). 그간 아버지가 보여준 모습만으로 판단하였을 뿐, 아버지가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른다.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퇴근하신 후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말해준 적은 없었고, 나 또한 굳이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공구를 능숙하게 다루고, 집안에 있는 기계를 고쳤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였다.




아버지의 직장을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 가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었던 학창시절에 비해,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먼 곳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놀러 갈 만큼 부지런하지는 않던 나는 자연스레 고등학생 때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야 했고, 그러면서  전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님이 일터에서 느꼈을 힘듦을 조금이나마 체험하며, 두 분이 집에서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도록 서슴 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친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들어오실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 때때로 아버지를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가끔은 둘이서만 밥을 먹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아버지가 좋아할 법한 스포츠 이야기부터 아침에 본 뉴스 이야기까지 여러 가지를 말하곤 했다. 물론 말을 하는 사람은 나였고, 아버지는 늘 그랬듯 조용히 듣고 계셨다. 그래도 스마트폰을 쓰게 된 이후부터 여러 정보를 많이 보시는지 최근에는 아버지도 종종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와 친해지고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전등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전등이 문제가 생겼을 때면 어디선가 새 전등을 가져와서 바꿔놓았다. 그 전등은 아버지 회사에서 제작하는 제품이었다. 아버지는 지난 몇 년 간 우리 집에 모든 전등을 밝은 LED로 바꾸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척 집에 있는 전등도 아버지가 대부분 교체한 전등이다. 아버지는 명절 때면 차 안에 전등을  싣는다. 장시간의 운전으로 피곤할 법도 하고, 쉴 틈 없이 일하시기 때문에 명절에는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아버지는 친척 집에 도착해서 전등을 교체할 준비를 한다. 그 외에도 공구를 챙겨와서 여러 가지를 고쳐주는데, 단순히 선의만으로 그렇게 한다는 게 실로 놀라웠다. 집에선 인색하지만, 밖에선 한없이 선한 아버지를 보시며, 어머니는 내게 너희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시다, 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너무’라는 말이 같이 붙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등을 교체하거나 기계를 수리하는 모습을 보시며, 나를 불러 잔소리를 하시는 편이다. 저 일을 언제까지 아버지가 하실 수는 없고, 사람이라면 자고로 저렇게 자잘한 일도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아버지를 보시는 내내 내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한 소리를 하신다. 나는 보통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는 시늉을 하거나, 또 그 소리냐며 도리어 내가 어머니께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기술을 평생 배워본 적도 없었고,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전에 아버지가 다 고쳐 놓으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잔소리가 잘 와닿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교체한 LED 전등이 환한 빛을 뿜어낼 때, 아버지의 얼굴에 짙어진 주름의 그림자가 보였다. 매일매일 함께 해서 잘 느낄 수 없었지만, 집에 있는 오래 전 사진을 볼 때면, 아버지의 얼굴에 그림자가 전보다 많이 짙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두 해 전부터 약을 드셨다. 당신께서는 건강의 어떤 문제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당뇨약인 듯했다. 아버지 집안은 고혈압이나 당뇨가 가족력으로 있는데,  나이가 드시면서 아버지 역시 가족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느끼고부터 어머니의 잔소리가 남일 같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지금의 삶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았다. 내 방을 뒤척이며 청소 좀 하라고 귀가 따갑게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와 투덜투덜거리며 어머니와 데이트하러 (끌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더 이상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 영원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신호를보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도 아버지가 하는 일 정도는 할 줄은 알아야 어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까지 아버지가 저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고민을 했다




지난 설에도 여지 없이 아버지는 전등을 챙겼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5시간이 넘는 운전에도 도착하자마자 전등을 교체하는 일부터 하셨다. 어머니의 잔소리 또한 변함 없이 함께 했다. 달라진 점은 내가 아버지를 도와드렸다는 점이다. 친척 집 구석구석을 살피며 전등을 교체하는 아버지를 도우며, 아버지가 어떻게 전등을 교체하는지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궁시렁궁시렁 질문을 던지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한 번쯤은 맨손으로 전등 교체하는 건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를 하셨다. (정작 아버지는 맨손으로 전등을 교체하셨다.)


며칠 간 아버지가 전등을 교체하는 모습을 보며,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나는 적응의 동물인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아버지보다는 미숙한 솜씨로 어찌저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굳이 아버지께 연락하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고치는 방법도 알아서 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냥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가 먼 길을 달려가 전등을 교체하셨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그러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건강한 모습의 아버지를 오래도록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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