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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Nov 07. 2021

어른아이

마음클리닉 3

병원 진료실에는 의사 선생님과 마주 보는 의자 바로 앞, 내가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에 휴지가 놓여있다.

 

처음에는 주에 한 번씩 병원을 방문했다.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내 이야기를 쏟아내는 시간이었다. 방문할 때마다 20분씩 상담을 했다. 친구들에게 그랬듯 의사 선생님에게 매시간 내가 살아온 인생을 쏟아냈다. 나와 내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사랑과 전쟁 급’의 일들을.

 

한바탕 내 이야기를 꺼내고 나면 그 끝에 나를 덮쳐오는 건 원망과 절망, 슬픔이었다. 그때서야 병원 진료실에 왜 휴지가 구비되어 있는지를 알았다. 나는 상담을 할 때마다 울었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를 아예 모르는 의사 선생님이어서 친구들에게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훌륭한 청자였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일이 터졌던 상황에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살폈고, 내 이야기 속에서 내가 말했던 단어들을 짚어가며 상담을 했다. 정신과 상담은 나에게 맞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나는 운 좋게도 그런 분을 한 번에 만난 케이스였다.

 

이런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은 말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넌 참 잘 자랐다. 너희 부모님은 진짜 복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잘 자라준 너한테 감사해야 돼.’

 

고모 역시 말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를 보며 너는 정말 애어른이라고.

 

하지만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다 보면 문득문득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사실 잘 자란 게 아니라 그저 짓물러 터지는 상처를 방치한 채 아픔을 눌러 참았을 뿐이라는 것. 일찍 어른이 된 게 아니라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나이만 먹은 어른아이에 불과하다는 것. 나의 우울증은 오랜 시간 지속되어 왔다는 것.

 

상담은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새삼 내가 했던 말이, 행동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나는 내내 망가지고 있었구나. 동생을 위해 했던 행동이 오히려 동생을 망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잘못한 일, 반성해야 할 일은 반성했다. 그리고 상담하는 순간만큼은 함부로 드러내지 못했던 원망도 실컷 했다. 싫은 건 싫다고, 미운 건 밉다고.


그리 대단한 변화를 기대하고 병원을 찾는 건 아니었다. 병원에 다닌다고 해서 내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고 약물치료가 나에게 통하길 바랐다.


그런데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변화가 생겼다. 병원에 다닌 지 2년, 엄마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건 정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낯선 변화였다. 나는 내가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게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나에게 닥친 변화가 그저 신기하고 얼떨떨했다.

 

좋은 기억은 내 생각보다 빨리 잊혀지고, 나쁜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흐릿하게든 선명하게든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기에 기억하는 것이므로 나쁜 일을 쉽게 지워내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비워내려고 연습을 한다. 그러다 또 바보처럼 무뎌지려고도 하는데 그건 잘못된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무뎌지지 말고 바로 보자. 아픔을 마주하는 게 두려울 순 있으나, 마주하고 부딪쳐야만 치유되는 것 또한 있기 마련이다.

 

내 안의 상처는 크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오래되어 흉이 졌다. 병원을 찾아갈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계속 상처 받고 고통받았을 것이다.


내 상처를 들여다보기 위해선 나를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한다. 자신 안의 목소리에 한 번쯤 귀 기울여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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