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수치심과 비참함으로 버텨낸 하루

결제가 되지 않는 순간

by 이숨

생활비를 겨우 보태는 아이들 아빠이다. 그 사실이 나를 작게 만들 때가 많다.
아빠라는 이름 앞에 붙은 역할이, 늘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제일 서럽고 힘이 들었던 순간은 아이들이 아빠에게 필요한 것이 생겼다고 말할 때였다.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 아빠의 카드로 돈이 입금되고, 나는 그 카드로 결제를 한다.

직접적인 소통이 아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너희 이거 필요하면 아빠한테 말해서 입금해 달라고 해.”라고 전해야 하는 구조다.

아이들은 가끔 그 과정이 귀찮아 보이고, 때로는 말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있음에도 타이밍을 놓치거나, 서로의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이 생긴다.

그날도 그런 하루였다.
큰 말다툼은 없었지만, 말 몇 마디가 오가지 않았고 필요한 것은 제때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괜히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왜 나는 직접 해줄 수 없는 아빠일까.’ 그 생각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가 마트에서 너희 먹을 걸 사야 하니까, 아빠한테 카드에 얼마 입금해 달라고 말해줄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익숙한 동선, 익숙한 물건들. 하지만 계산대 앞에서 멈췄다.
결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조용한 기계음처럼 내 귀에 닿았다.

결제가 안 될 때마다 밀려오는 감정이 있다. 화와 수치심이 한꺼번에 올라와 잠깐 숨이 막힌다.
이 감정은 설명하려 하면 더 초라해져서, 늘 혼자 삼킨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아이들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한창 게임에 빠져 있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미안함이 먼저 들었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그렇게 몇 번의 통화를 더 하고 나서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그냥, 사지 말자고 나는 계산대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거… 다음에 살게요.”
그러자 캐셔 이모님은 미안한 표정도, 놀란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그럼 물건은 제자리에 갖다 놓아 주세요.” 라고 말했다.

장바구니에 담았던 물건들을 하나씩 다시 집어 들었다.
우유를 냉장 진열대로, 과자를 과자 코너로, 아이들이 좋아하던 간식을 원래 자리로.

그 짧은 동선이 이상하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순간마다 내 마음도 같이 접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참해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무엇보다아이들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앉혀 놓고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다음엔 아빠한테 부탁할 때 조금만 더 잘 말해보자.” 다독이듯 말했지만,
그 말이 사실은 아이들보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을 차리고, 아이들을 씻기고, 하루를 끝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을 이어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식탁 위의 말들, 욕실에 남은 물기, 불을 끄고 문을 닫는 순서까지도
늘 하던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애써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아이들이 그날은 유난히 일찍 잠이 들었다.

마치 내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작은 숨소리가 방 안에 고르게 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내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은 채 울었다.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나 자신이 싫었고,끝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너무 힘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수치심을 더 이상 겪지 않으면서,
내 아이들과 그리고 나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울고, 또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날은 정말 버거운 하루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날을 눈물로라도 끝까지 살아냈다. 아무도 몰랐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하루를 버텨냈다. 그래도, 이 하루가
그냥 버틴 하루로만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 하루가 아니라,
나와 아이들이 조금은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은 서로를 지켜주는 하루로 기억되기를.

아이들 아빠로 인해 수치심과 비참함 속에서도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되기를.
아이들은 금세 잊어버릴지 몰라도, 이 하루는 나에게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일, 또다시 흔들리더라도 오늘의 눈물과 하루의 무게를 잊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그저, 그렇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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