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날 무대에서 울었을까

by 글이내벗


화창했던 전날과 달리 공연 날 아침이 밝자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년 첫 공연 날에도 비가 왔던 터라,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래도 이상하게 작년과는 달리 공연 당일인데도 크게 긴장이 되지 않았다. 공연 연습하느라 꽃구경도 한 번 못했는데 봄비에 벚꽃 잎이 모두 떨어져 버릴까 봐 긴장감보다는 초조한 마음이 더 컸다.


공연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으로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조연출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오늘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저희 공연을 관람해 주신답니다. 최선을 다해서 연기해 주세요.”


순간 머리를 쇠망치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공연은 지인 위주의 객석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무료지만) 포털 사이트에서 예매해서 볼 수 있는 무대였다. 다시 무대에 서겠다고 결심하게 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관객들 가운데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계신다니.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공연에 대한 긴장감이 뒤늦게 폭발한 것이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배우 전원의 합창으로 공연의 막이 올랐다. 연습 내내 나를 괴롭히던 커플 연기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합창이 끝나고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주인공)가 무대에 등장하자 객석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닦는 관객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울컥해 눈물이 맺혔다.


‘아직 본격적인 장면도 아닌데 이래서야 어떡하지….’


걱정이 밀려왔다. 작년처럼 관객석 대신 허공만 바라보고 연기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도 스쳤다.


공연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해마다 4월이 되면 갈매기는 바다에서 별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입에 물고 날아와 떨어지는 꽃잎에 올려 사람들에게 전하지만, 사람들은 소문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거나 잊어버린 지 오래다. 한 아이가 갈매기가 소문을 건져 올린 바다를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도중에 만난 마을 사람들은 도로를 만들고, 공장을 세우고, 아파트를 지을 땅을 만드는 일에만 집착할 뿐, 소문을 믿는 사람을 오히려 조롱한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은 초반엔 마을 사람들끼리 투닥거리며 마을을 찾은 아이를 조롱하는, 다소 코믹한 분위기로 시작된다. 그러다 집착하던 땅이 강물에 쓸려내려 가 감정이 폭발한 채로 노래를 부른다. 앞부분에서는 나의 코믹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을 잠시 멎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관객석을 비추는 카메라를 힐끗 보자 여전히 몇몇 관객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내 마음도 흔들려, 그다음부터는 일부러 관객석을 보지 않으려 했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품고 힘차게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무대 위에 서자 조명에 눈이 부셔 관객석이 희미하게 보였다. 눈앞에 뵈는 것이 없으니 한결 편하게 연기에 집중했다. 더 신나게 몸 개그를 하고 더욱 신랄하게 아이를 조롱했다.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웃음소리에 '됐다. 성공했다!' 하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후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노래가 시작되는 클라이맥스 장면이 다가왔다. 이 장면은 연습 내내 보컬 선생님과 연출 선생님께 지적을 많이 받았던 부분이기도 했다. 노래는 안정적으로 부르지만 감정 표현이 부족하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그래서 이 장면은 특히 내게 있어 큰 고비였다.


노래하며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막상 무대 위에서 관객을 마주하고 그 속에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계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역할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소문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았는데,

강물에 쓸려가는 내 땅을 보고 있자니 허탈하고 막막하고, 급기야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노래에 감정이 실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날 처음 제대로 깨달았다. 연습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가 몸 안에서 솟구쳤고, 어느새 나는 연기자가 아니라 분노에 찬 마을 사람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결국 마지막 클라이맥스 구간에서 감정이 폭발했다. 노래가 끝났음에도 가쁜 숨과 들썩이는 어깨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뺨에는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명 때문이 아니라 눈물이 앞을 가려 관객석은 물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대사를 이어갔다. 연습 때는 버벅거리던 대사가 마치 내가 정말 하고 싶던 말을 쏟아내듯 자연스레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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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무대의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것은 배우와 관객 사이의 공기가 실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 같은 짜릿한 감각이었다. 이렇게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해 본 경험은,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감정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대기실 구석에 앉아 한참 동안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제 엔딩 장면만을 남겨뒀기에 북받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했다. 서서히 감정을 추스른 뒤 동료 배우들에게 혹시 실수한 부분은 없었냐고 물었다. 다행히 실수는 없었고, 연습 때보다 훨씬 잘했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평소 같으면 이러한 칭찬에 기뻤했을 텐데, 이날은 무대 위에서 감정 조절에 실패한 것 같아 동료들의 칭찬이 와닿지 않았다.


그래도 실수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마지막 엔딩 장면을 준비했다. 그 장면만 무사히 넘어가면 오늘 공연은 최소 80점은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이란 것이 늘 그렇듯, 내 예상대로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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