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터진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by 글이내벗

2회차 공연을 앞두고 저녁 도시락이 제공되었지만, 여전히 밥은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면 내 인생에 다시없을 마지막 뮤지컬 공연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대에서 남은 힘을 쥐어짜기 위해 절반 정도 꾸역꾸역 먹었다. 이번 공연에는 가족과 지인들이 온다. 가족들이 보러 온다고 생각하니 첫 공연보다 훨씬 긴장됐다. 부모님과 장인·장모님 모두 나의 뮤지컬 도전 소식을 듣고 적잖이 놀라셨다고 한다. 내성적인 줄만 알던 아들이, 사위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 하셨을 것이다. 여섯 살 아들은 주말마다 사라지던 아빠가 드디어 무대에 오른다니 어제부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나를 보러 오는 가족들과 지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2회차 공연은 더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야 했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이번엔 빈 객석 대신 관객을 바라보며 노래해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러다 가족을 발견할까 봐 또다시 2층 빈 좌석만 바라보며 노래했다. 잠시 후 내 독무대가 시작됐다. 다시 한번 핀 조명이 나를 향해 무심하게 떨어지면서 나의 시선을 툭 끊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점을 이용해 조금 더 자신 있게 대사를 이어가려는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다! 아빠!”


순간 뇌의 회로가 또 한 번 멈췄다. 하필 이럴 때 아들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하마터면 대사를 까먹을 뻔했다. 얼마나 많이 연습해서 외운 대사인데,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이내 정신을 다잡고 대사와 노래를 이어갔다. 이번에도 위기를 잘 넘겼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다.


앞서 한 번 무대에 오르고 보니 배우들 연기에 자신감이 붙었다. 모두들 대사는 더 또렷하게, 노래는 더 힘차게, 저마다 펄펄 나는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극은 끝을 향해 달려가며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장면으로 들어섰다.


아랫집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가 나서 백수가 내려갔더니, 아랫집 안에 가스가 가득 차 기침을 하면서 백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연기를 밖으로 빼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지퍼가 고장 나 옷이 벗겨지지 않았다. 힘을 주어 지퍼를 내려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낑낑대는 내 모습에 결국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관객들의 웃음소리에 나는 더욱 당황하며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어쩌지....?’


얼굴뿐 아니라 귀, 손발까지, 온몸이 새빨개지고 뜨거워지는 듯했다. '포기해? 계속 시도해?' 스스로에게 수십 번 물었다. 계속되는 시도에도 지퍼는 풀리지 않았고 결국 나는 옷을 벗지 못하고 반쯤 걸친 채 서 있었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어쩔 줄 몰라 잠깐 멈춰 있었다. 이를 본 동료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에 힘을 꽉 주고 있다. 그 웃긴 장면을 보고도 내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대형사고임을 직감했다. 머릿속에 하얘지다 못해 투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무대에서 내려와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얼굴이 또다시 붉으락푸르락해지려 하던 그때, 옆에 있던 동료가 소곤거리듯 내 대사 앞부분을 읊어주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것을 이어받아 대사를 이어갔고, 장면을 무사히 마치고 무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그 장면을 내가 통째로 망칠 뻔했다.


나 때문에 극의 흐름을 망친 건 아닌지 계속 마음이 쓰였다.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대신 무대 커튼 뒤에서 동료들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 하필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으니, 사실상 내가 공연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마지막 장면만 남았는데, 공연이고 뭐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가족도 와 있는 자리에서 하필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니. 네 달간 연습했던 공연이 끝났지만 홀가분하기보다는 아까의 당황하던 장면이 자꾸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로비로 나가 가족들을 보니 울컥했다. 그들에게서 아무 말도 듣기 전에 이미 눈물이 터져 버렸다. 그 눈물 속엔 긴장감, 아쉬움, 감사함, 미안함 등 여러 감정들이 서로 엉키고 엉켜 풀어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런 나를 가족들은 토닥여주며 엄청 잘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셨다. 아무도 내 실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대단한 도전을 해냈다며 엄지를 치켜올려주었다. 역시 가족이야말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무대를 비워줘야 하는 시간이 있어 찾아온 가족들과 충분히 이야기 나누지도 못한 채, 분장을 지우거나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서둘러 무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축 처진 상태로 정리하는 나에게 동료 배우들은 괜찮다며 오히려 “그 장면 웃기지 않았냐"라고 위로해 주었다. 마음속으론 '그 장면은 웃음이 나면 안 되는 장면이었는데…' 싶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고마운 척 웃어 보였다.


공연의 피날레인 뒤풀이가 이어졌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뒤풀이였지만, 나는 즐겁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연출 선생님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글이내벗쌤, 오늘 정말 잘하셨어요. 무대 체질이던데요? 두 번째 공연의 해프닝은 공연에서 흔히 있는 일이에요. 너무 주눅 들지 마세요.”


연출 선생님의 말에 심장을 꽁꽁 둘러싸매고 있던 밧줄이 후루룩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만약 서 있었다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동료들이 위로해 줄 때에는 인사치레로만 들렸는데, 나한테 총구를 겨누던 연출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정이 더욱 북받쳤다. '그래, 글이내벗, 고생했어.' 그제야 스스로에게 수고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뮤지컬 도전은 막을 내렸다. 연습할 땐 엄청난 스트레스였는데, 막상 끝나고 보니 허전하고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뒤풀이 후 늦게 잠들어 비몽사몽인 아침, 아들 녀석이 다가와 말했다.


“아빠, 어제 진짜 멋졌어!”

그 어떤 칭찬보다 감격스러웠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았다.

“고마워, 아들.”

“아빠, 그럼 이제 공연 연습 안 가?”

“응, 이제 안 가.”

“우와! 신난다! 아빠랑 많이 놀 수 있다! 아빠, 그럼 앞으로 공연 연습 안 갈 거라고 약속해!”


서툰 손가락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와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겠다며 가족에게 소홀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가정에 더 충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공연은 끝났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쉬움에 자꾸 지난날 돌아보았다. 두 번 공연에서의 해프닝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직 '백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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