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가 다녔던 교회들에서 유독 기억에 각인된 풍경이 있다.
단체로 방언이 터지는 풍경이다.
그 장면은 아무리 되새겨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곳에서 들렸던 소리를 글로 표현하면
‘옐렐렐렐레 옐렐렐렐레레’ 뭐 이런 식의 말이 반복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방언이란 사라진 말이라거나 천사의 언어, 하나님만이 알아들으시는 이야기라고 믿는다. 아무튼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고 알고 있다. 참고로 나는 외고, 외대를 나왔고, 군대는 통역병으로 다녀왔다. 그런데 그런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 보통 기도를 하다 보면 터져 나온다는데,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학창시절 여름에는 여름 성경학교, 겨울에는 겨울 성경학교에 갔다. 그런데 꼭 그 성경학교들에서는 하루 밤을 잡아서 큰 예배당에 사람을 모아놓고 기도를 하게 하고, 이 과정에서 정말 수백명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나왔다. 배경묘사를 하자면, 목사가 양팔을 들고 기도를 시작하고,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음악이 배경음으로 깔리면 대부분이 방언을 쏟아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있었고, 밤마다 방언을 터뜨리며 기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그다지 신앙이 깊지 않아 이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모임 근처에 가기만 해도 무서웠다. 껌껌한 복도에서 여러명의 방언이 굉장히 기괴하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능 시험이 다가와 불안할수록 그 친구들의 입에서는 더 많은 방언이 터져 나왔다. 무슨 언어인지 아느냐? 라고 물었으나 언어를 잘한다는 친구들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곤 자신이 방언을 했다는 사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다.
이후 나는 성경을 공부했고, 방언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리고 참 어이가 없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방언은 알지 못했던 외국어를 기적적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주로 여러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용됐다. 또한, 이 성경들의 원문을 보면 방언을 ‘말한다’라고 하지 ‘기도한다’고 하지도 않는다. 방언은 기도할 때 터뜨리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이러한 방언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 2, 10, 19장, 고린도전서 14장에 기록돼 있다.
본인과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방언은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가짜 방언이었다. 김승진 침례신학대 교수는 이를 “마귀가 주는 방언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많은 성경 전문가들이 이에 동의한다. 자신이 기도하며 방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어떤 이들이 실제로 말한 것이 다른 언어와 비슷한 소리일 뿐이라고 밝혀지기도 했다.
박광석 일산벧엘교회 목사는 <크리스천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를 포함한 우리나라 성도들은 성경 중심이 아니라 사건 중심의 신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신비 체험 같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제대로 알고 신앙의 논리를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도 논리가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는 “당연합니다. 논리는 경험을 확정 지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리라는 토대 없이는 경험은 말 그대로 경험일 뿐입니다. 다른 신화나 신비주의, 이단들도 우리와 경험은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이 이단으로 가는 것인지, 한참을 돌아가는 것인지 경험만으론 설명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경험만 추구해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수많은 방언들을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었을까. 그 기도 내용은 기독교의 가치에 합당했을까. 지금까지 만난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 읽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