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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Mar 10. 2021

격변을 만드는 ‘플롯’

'재미의 발견' 예약 판매 중 선공개 (37)

은유가 시인의 도구라면, 스토리텔러의 도구는 플롯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뿐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이나 광고를 제작할 때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아주 짧은 콘텐츠를 만들 때도 크리에이터들은 플롯을 신경 씁니다. 


어떤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건조하게 나열한 것이 스토리(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이야기)라면, 플롯은 그 스토리에서 사건의 배열을 다르게 하는 구성방식, 혹은 사건을 전개하는 특정한 패턴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색다른 구슬들이 달린 목걸이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구슬 하나하나가 사건이라면, 목걸이는 스토리이고, 목걸이에서 구슬들을 빼내서 많은 부분 버려버리고 독특하게 다시 엮으면 그것이 곧 플롯입니다. 


사건들을 새롭게 엮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한다면 좋은 플롯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강조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플롯은 결국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의 변화’를 강조하는 이야기 구성방식입니다. 좋은 플롯이라면 이 변화의 정도는 격변으로 인식될 정도여서 시청자의 당혹과 집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격변으로 인식될 정도’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어떤 플롯이 아무리 급격한 상황 변화를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클리셰라면 격변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전·격을 만들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아무리 불구경이 ‘보통’에서 크게 벗어난 상태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너무나 흔해졌다면 더 이상 특이하지 않습니다. 좋은 플롯 역시 그 플롯이 뻔하게 느껴지기 전까지만 격변을 만들어냅니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이 사용돼 뻔한 패턴으로 인식될 수 있는 플롯을 전통적인 플롯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인 플롯이 많이 쓰인 이유는 이러한 플롯이 격변을 만들 수 있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됐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플롯이 만들어내는 격변을 몇 가지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 모험(Adventure) 플롯에서 주인공은 뜻밖의 여정을 떠나고, 갖은 고난을 겪다가 결국 내적·외적으로 변화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뜻밖의 여정과 고난들, 그리고 내적 성장이 바로 격변입니다. 가령 <호빗>에서는 주인공 빌보 배긴스의 집에 느닷없이 드워프들과 마법사가 들이닥칩니다. 그들은 황금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에레보스 왕국을 되찾으러 가자고 제안합니다. 주인공의 평온하고 지루하던 일상은 주인공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극적으로 바뀝니다. 1차 격변입니다. 편안하게 집에서 차나 마시던 배긴스가 골룸과 위험천만한 수수께끼 대결을 펼쳐 절대반지를 훔치고, 그 반지를 이용해 스마우그의 성으로 들어가는 고난의 장면들도 모두 모험 플롯을 타고 일어나는 ‘격변들’이었습니다. 모험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섯 군대의 전투’에까지 참여하게 된 배긴스는 전쟁이 끝나고 내적·외적으로 변화된 채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안식을 취합니다. 3차 격변입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나 <행오버> 같은 퀘스트(Quest, 탐색 : 드러나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 따위를 찾아내거나 밝히기 위해 살피어 찾음)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하게 되고, 그것을 순차적으로 ‘탐색’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릅니다. 


당장 당신의 가족 중 한 명이 사라졌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로 인해 당신이 처한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합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실마리를 하나하나 발견해나갈 때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셈입니다. 가령 영화 <행오버> 시리즈에서는 친구들이 여행 중 한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영화는 이러한 황당한 잃어버림과 그 잃어버림을 한 단계 한 단계 극복하는 과정을 펼쳐내며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크게 변화시켜나갑니다.  


이번에는 영화 <쇼생크탈출>이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차용한 ‘잡혔다가 도망치는’(Capture-Escape) 플롯입니다. 이제는 감이 잡힐 겁니다. 등장인물이 어떤 존재에게 잡히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존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애쓰는 고난의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잡혔다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은 계속해서 급격하게 변합니다.  


이 외에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반대와 역경을 무릅쓰고 속박된 누군가를 구해내는 구조(Rescue) 플롯, 주인공이 바퀴벌레로 변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처럼 주인공이 외적으로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형하는 고난에 처하고, 결과적으로 내적으로도 변화하는 변형(Metamorphosis) 플롯,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에 봉착하고 그것의 정체에 한발 한발 다가가는 미스터리(Mystery) 플롯, <본 아이덴티티>로 대표되는 ‘본’ 시리즈나 <메멘토>처럼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체성 찾기(Gain Identity) 플롯, 영화 <타이타닉>이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제삼자가 반대하는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 사랑을 이뤄내고야 마는 금지된 사랑(Forbidden Love) 플롯 등이 있습니다. 가령 영화 <러브액츄얼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져 썸을 타게 된 연인 네 쌍이 각각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이뤄내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전통적인 플롯은 일전에 설명했던 ‘장르’와 비슷합니다. 비슷비슷한 형태의 격변이 일어나는 이야기들끼리 분류했더니 이러한 플롯의 정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한편으로 전통적인 플롯은 클리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플롯들을 너무나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플롯들이 격변으로 인식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이야기가 어떤 플롯을 타고 흐르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아 다음에는 결국 이렇게 되겠네’ 하고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아동을 타깃으로 하는 콘텐츠일수록 플롯이 단순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일수록 여러 플롯들을 섞거나 플롯을 꺾는 등 복잡한 이유입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전통적인 플롯 하나만을 사용했다가는 집중력을 잃고 극장을 나가거나 채널을 돌려버릴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플롯은 더 이상 격변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많은 시청자의 당혹과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플롯을 그저 도입하는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캐릭터나 소재, 배경 설정에 특이점을 주든, 플롯에 트위스트를 주든, 두 가지 이상의 플롯을 절묘하게 섞든, 플롯이 일으키는 격변의 폭을 더욱 크게 만들든, 특·전·격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2020년 상반기 시청률 16.1%를 기록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너무나 뻔한 복수극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은 다음 장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했고, 그것이 대부분 들어맞았습니다. 뻔한 플롯이었지만 드라마는 성공했습니다. 박새로이를 필두로 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독특한 매력은 결코 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태원 클라쓰>는 ‘보통’을 벗어난 캐릭터 설정 덕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2020년 상반기 최고시청률 28.4%를 기록한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전통적인 복수(Revenge) 플롯의 격변 폭을 극대화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김희애가 남편의 불륜과 친구들의 배신을 인지하고 모든 게 완벽했던 삶에서 완전한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드라마 초반부 격변의 폭은 그동안 불륜을 다뤘던 그 어떤 드라마에서의 격변 폭보다 커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당혹감을 일으켰습니다.



*이 글은 기자 생활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의 일부입니다. '재미의 발견'은 3월 26일 정식 출간되며(어쩌면 출간일이 앞당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에서 예약 판매 중입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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