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의 밑바닥에 날개가 있음을…
신명기 32장 11절
3년 전 한 친구는 직장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그의 상사는 상습적으로 그의 살을 만졌다고 했다.
팔뚝 안쪽 살을 치고 만지고, 주물렀다고.
상사는 계속해서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었고
회사 일정에도 없는 1박 2일 세미나를 같이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6개월간 지속되는 상습적인 성추행에 그는 병가를 내고
상사를 고소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상사는 대표와 일가친척 관계였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잘 알던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그와 연락을 끊었다.
성추행 장면을 목격하지 않은 이들도 상사를 위한 탄원서를 썼다.
상사는 적극적으로 그러한 탄원서들을 받아냈다.
심지어 친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입에게서도.
친구는 노무사를 고용했으나
노무사는 회사에 돈을 받았는지
사측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만들어갔다.
회사에서는 조정하는 척하더니
그를 원래 직무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그를 감시하며 단순 업무만을 반복하게 했다.
가해자에게는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친구는 결국 다시 병가를 냈다.
1년, 2년... 법정 싸움이 계속됐다.
그 사이 친구는 진술서를 200장 넘게 썼고
집에서 2시간 거리인 검찰청을 들락거렸고
정신과에 다니게 됐고
항우울제와 독한 수면제를 먹게 됐다.
성추행한 이는 웃으며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친구의 오랜 꿈이었던 직업, 수년을 준비해 정말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친구는 혐오하게 됐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그 말에 나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러한 아픔들을 들어줄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친구와 나 둘 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때로는 하나님이 야속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만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항상 기도해. 기도 열심히 하자.”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지금도 역시 나는 묵묵히 들어줄 뿐이고, 별다른 수도 없지만,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또 매일 성경을 읽는다.
어제는 우연히 읽게 된 이 말씀을 보내줬다.
“독수리는 새끼들을 둥지에서 떨어뜨려
스스로 나는 것을 가르칠 때에
항상 새끼들을 위해서 감시하고
지쳐서 떨어지는 새끼가 있으면
그 밑으로 날갯죽지를 펴 받아서
안전하게 다시 둥지에 내려놓는다.
이와 똑같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가르치고 보호해 주셨다.“ (신명기 32장 11절)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내신 하나님은
이들을 또 광야에서 수십 년간 떠돌게 하신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그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커진다.
정착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은 노예 생활을 하더라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우상을 섬기기도 한다.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노예 생활도 지긋지긋했는데,
노예 생활보다 못한 떠돌이 생활이라니.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수십 년간 떠돌았음에도 신발이 닳지 않았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지켰으며
‘만나’라는 떡을 먹으며 굶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 중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날개가 그들을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을까, 스스로 나는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였을까.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불만을 품고 우상을 숭배한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모세조차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맹수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살아남는 새끼만 키운다.
어떤 동물들은 너무 약하게 태어난 자식은 버려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수리와 같이
자식의 떨어짐을 지켜보다가
날개로 받치신다.
그 목적은 알 수 없다.
그러니 친구여
자네의 밑바닥에 하나님의 날개가 받치고 있음을 잊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