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그린 Sep 10. 2022

침묵을 깨뜨리다

성추행,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 열차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비속어가 섞인 한숨 소리여서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그 앞에는 대학생인 듯한 여자가 팔을 늘어뜨려 종이 쇼핑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열차가 움직일 때마다 봉투 끝부분이 아저씨의 다리를 툭툭 쳤다. 아저씨는 여자에게 봉투가 자꾸 다리를 치니 치워달라고 했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며 한 손으로 열차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 봉투를 품에 안았다.


여기까지는 만원 열차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아저씨의 행동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저씨는 여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는지 묻더니, 봉투를 쿡쿡 찌르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까지 물어보았다. 여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답해줬다. 아저씨는 난데없이 자기 아내도 여자가 입은 것과 비슷한 옷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봉투를 들고 있는 여자의 팔을 쓱쓱 쓰다듬었다.


여자는 흰색 프릴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봉투를 든 여자의 팔은 살이 훤히 드러났다. 블라우스 소매가 팔꿈치까지만 왔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그 맨살을 손으로 쓱쓱 쓰다듬어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흘금거렸다. 하지만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 이런 옷이 있는데 말이야….” 하며 계속 쓰다듬었다. 여자는 팔을 슬쩍 비틀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팔 만지지 마세요.” 순간적으로 나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저씨는 손을 내리며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 말이야?” 날카롭게 반문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팔을 만지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요즘 젊은 애들이 말하는 성폭행하지 말라는 소리냐며 화를 냈다. 성폭행이 아니라 성추행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팔 만지지 마세요,” 라고 또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씩씩대다가 앞에 선 사람들을 밀치고 일어서서 내렸다.


여자는 아저씨의 그 자리에 앉았다. 내게 따로 인사를 하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나 또한 어떤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여자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출입문 근처 철봉을 붙잡고 서서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지하철을 타고 수학 학원에 가는 길이었다. 열차 안에서 중년 아저씨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학생들은 요즘 방학이냐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하며 아저씨가 묻는 시시콜콜한 질문들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A역에서 B역까지 가는 두 정거장 동안 말을 나눴다. 우리는 같은 역에서 내렸다. 아저씨는 내게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걸어갔다.


그때 나는 아저씨에게 허리를 굽혀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뒤따라 달려가 “아저씨!” 라고 한 다음 아저씨가 뒤돌아보자, “안녕히 가세요!” 하고 우렁차게 외치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아저씨를 지나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강한 힘이 나를 붙들었다. 인사를 건넸던 그 중년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뒤에서 한 손으로는 내 옆구리, 다른 손으로는 내 가슴을 강하게 쥐어 잡으며 볼에 입을 맞췄다. 나는 당황해서 말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맞은편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를 지르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과 침묵은 나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몇 번을 더 볼에 입을 맞추고 몸을 만진 다음, 아저씨는 나를 놓아주고 아무렇게 않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나를 내려다보며 “또 보자!” 하고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기분 나쁜 행동을 해놓고 너무나도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저씨를 보니 내가 불쾌해도 되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천천히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아저씨가 도무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황토색 인조가죽으로 된 겉면과 양털 안감으로 된 무스탕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속에는 두꺼운 하얀색 스웨터를 입었었다. 잡지에 나온 연예인처럼 매력적인 차림이었던 것도 아니고 평범했었다. 그리고 생김새도 특출나게 예쁘지 않았다. 나와 그 아저씨의 행동 사이에 어떠한 통념적인 상관관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내가 너무 친절하게 대답했던 게 문제였을까, 혹은 괜히 달려가서 허리 굽혀 인사까지 드려서 문제였던 걸까 고민하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나는 수학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께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너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돼.”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선생님은 그냥 그러면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나는 이후 그 일에 대해 침묵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나는, 지하철에서 여자의 팔을 쓰다듬는 아저씨를 보며 침묵할 수 없었다. 팔을 만지지 말라는 말이 처음에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지만, 반박하는 아저씨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침묵하고 넘어간다면, 여자가 나중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과 아저씨 행동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으며 고뇌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종이봉투를 들고 왔을까, 왜 하필 그 아저씨 앞에 섰을까, 흰색 프릴 블라우스를 하필 그날 왜 입고 나왔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으로 혼란스러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다. 아저씨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이상하다고. 그리고 부디 자신을 탓하지 않았으면 했다. 초등학생 때의 나도, 그 여자도 본인의 옷차림이나 생김새, 행동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다. 잘못은 허락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순간 혼란스럽고 자리를 피하기 쉽지 않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경험에 대해 침묵하라고 배우곤 한다. 마치 인정하면 내 몸이 더러워지기라도 하는 듯이.


이 때문에 나는 여자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네면, 아저씨가 자신의 팔을 만지며 추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에 여자는 침묵했지만, 내 행동이 언젠간 여자에게도 침묵을 깨뜨릴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목적지에서 내릴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이제 두렵지 않았다. 나는 힘찬 보폭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출구로 향했다.      


[표지 사진 출처]: Photo by Haley Truong on Unsplash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