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과 공포
초등학생 시절, 나에게 큰 공포감과 모욕감을 준 것을 손꼽으라고 하면, 난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나머지 공부'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 한 학급 40명 가까이 되는 친구들 중에서
일으켜 세운 후 공개적인 질문을 하거나, 쪽지시험들을 봐서 기준 미달일 경우,
모두가 집으로 갈 때 학교에 남아서 선생님의 Ok 사인이 있을 때까지 자습을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머지 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들이 대부분이 나처럼 빠른 년 생으로 학교를 빨리 들어왔던 친구들이었던 것 같다.
생일순으로, 출석번호를 매겼던 그 시절
남자 중 제일 느린 출석번호 21번 또는 22번
칠판 한편에 크게 새겨진 나머지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적힌 내 출석 번호는 나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고, 도태되어 간다는 심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친구들끼리는 자습이라는 명목하에
잡담 시간을 가졌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은 무슨 생각으로 우리들을 잡아뒀던 걸까라는 생각이 많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만의 과오는 아녔을진대
난 선생님이 자습을 시키는 게 아닌 우리에게 더 다정하게 가르침을 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에게 우리들은 그저 수업 시간에 제대로 듣지 않은 모질이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나 싶다.
유독 인내심을 요구하는 수학이라던가,신체적 발달을 요하는 체육중 몇몇 종목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에 학업에 흥미가 없지 않았다.
그저 무슨 말인지 모를 때 곧장 교과서의 빈 여백을 바라보곤 했을 뿐.
그래도, 내가 알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는 번쩍 손을 들고 발표를 하기도 했고, 이 발표가 굉장한 내용이길 기대하며, 선생님이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과 심장 고동소리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아닐까 싶다.
나름, 나답게 치부를 보이면서도 솔직하게 내 초등학교생활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의 이런 솔직한 면과 도태된 주제에 적극적이었던 성격은 나에게 큰 시련을 주었다.
어른의 계단으로 하나씩 밟아가고, 그 첫 관문이었던 6학년.
'어떤 일이건 간에 정말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나 같은 경우는, 지방직 공무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가 쓰라고 주신 지자체 심벌이 그려진 모자를 쓰고 등교를 했던 일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촌스러운 디자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내 맘에 들지도 않는 모자를
아버지의 강요 아닌 강요 때문에 쓰고 갔던 일이 그렇게 큰일이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아침에 등교를 했을 때 시끌벅적하던 분위기에서 굉장히 싸늘해짐을 느끼며,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무시한다는 그 차가운 느낌이 꽤 큰 상처로 남았고, 지금도 이 사건이 큰 트라우마가 되어 내 행동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이지 않는 적의를 좁은 교실에서 무한대로 받는 느낌, 1분 1초가 모든 순간이 불안했다.
나와 잘 지냈던 친구들 마저 나를 외면했고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물속에서 누군가가 앞장서서 나를 칼로 찔렀고 물속에 흐르는 내 피는 다른 이들의 먹이가 되어 더 빠르고 많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이 문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런 고충을 말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믿고 의지하던 친구들에게 당하는 배신은 이제 10살을 넘긴 아이에겐 너무나 가혹했다.
나의 하루는 조금씩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고
가라앉을수록 깜깜해졌고, 공포가 커져가는 만큼 더 고요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