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인생(42)

모래 지옥

by 강도르


벽을 넘어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있다.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할 수 없다고 스스로 단정하고 회피하던 것들이 있었다.

수험생활을 하면서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단순히 암기로써 극복을 하려고 했었다.

호락호락한 시험은 아니었다.어려운 용어와 문맥 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극복을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이해를 동반하지 않으니 공부가 지루하고, 지루하니 속행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계속 쓰는 행위를 반복했다.


쓰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 행위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름없게 변질되었고 이해와는 가장 거리가 먼 행위가 되었다.

시간을 채우는 공부를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공부를 하는 요령이 없다 보니 학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당최 강사들의 말은 이해가 하기 어려웠다. 열변을 토하는 사람,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 웃기게 말하는 사람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었지만 내게 이해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강의에 흥미가 떨어지고 단순 암기식 학습이 지속되다 보니 학업에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냥 오늘 해야 할 공부시간만 지키고 집 가서 드라마를 한편 보던 하루의 낙이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학업에 큰 벽이 생긴 기분이었고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리갈 하이


생활이 루즈해 지면서 낙을 찾다 보니 공부를 마치는 시간에는 종종 드라마를 보곤 했다.

기분전환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이런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한 번씩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훈을 주는 일본 드라마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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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갈 하이'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법치주의를 이야기하는 이 드라마는 굉장히 무겁지만 굉장히 가볍다.

무슨 말이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저 표현보다 더 적절하게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드라마는 인간의 도덕심과 사명감을 이야기하는 변호사 마유즈미 마치코와 높은 수임료를 지불하면 반드시 승소하게 해주는 백전 무패의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의 이야기이다.


변호사란 무엇인가?


실체적 진실과 소송의 결과는 같아야 하는 것인가?


변호사는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한다.

실체적 진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입장과 관점 그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하게 왜곡되어 간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시간과 재화를 투자한다.


재판은 그런 피고인과 원고들의 주장을 듣고 가장 합리적인 진술과 증거들에 의하여 무게추가 무거워진 이들의 손을 들어주고 철저하게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재판에 필요한 것은 칼날과 같은 실체적 진실인지,당사자 모두가 납득 가능한 적절한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드라마는 굉장히 다각적인 방향으로 사실을 비춘다.그 사실이 시청자의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무자비한 명제를 들고 시청자에게 던진다.

더욱 간절한 사람이 간절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나를 수임해라 반드시 승소하게 해주겠다.
그 대가는 돈이다.

돈만 준다면 어떤 소송이든 이기게 해주겠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을 알 수 없다.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코미카도 켄스케의 말은 듣다 보면 혹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쉴 새 없이 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재판의 격식을 사람들의 여론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에피소드는 등에 땀이 날 정도로 날카로운 명장면 중 하나였다.


법치주의의 근간에 대한 고찰을 동반하는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진짜 위기는 위기임을 자각하지 못한 때


하루를 하기 싫은 공부를 하면서 온몸을 비틀고 시간을 채우듯이 보낸 후 집에 와서는 드라마를 보며 낙을 찾는 이상한 하루들이 반복됐다.

'어차피 하루를 공부로 대부분 보냈으니 괜찮아'

그런 달콤한 합리화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시험을 봐야 하는 날은 다가왔지만, 주어진 자유를 나름의 규칙을 지키면서 만끽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룸메이트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고

나는 학원과 도서관을 반복하면서 집에 와서는 Tv를 보는 그런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는 왜 공부를 안 하고 왜 이렇게 집에 안 들어오지 같은 사소한 고민이 있었지만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발이 모래 속으로 빠져 점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고 있었다.

전역을 하고 반년 가까이 모래 지옥 같은 생활을 뒤로 한 채 경찰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은 4지 선다 객관식 100문제를 100분 안에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시험은 굉장히 어려웠다 시간은 흐르는데 지문을 읽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넓은 시험지 속에 빼곡히 채워진 글자들은 내 머릿속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지문을 반복해서 읽다 보니 이것도 정답 같고 저것도 정답 같은 혼란이 반복됐다.

이제껏 공부하는 방식으로는 나는 이 문제들을 풀어낼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시험 결과는 처참했고 내 생활이 굉장히 모래 지옥에 빠지는 생활이란 것도 깨달았다.

모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 속에 있는 나에게는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문제는 그 위기가 나에겐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위기임을 자각하지 못한 멍청함 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똑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별 효과가 없었는지 내가 공부하는 지방으로 와서 함께 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나는 이 일이 진정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어리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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