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인생(56)

전염

by 강도르


계급사회



계급사회를 지독하게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내가 속한 회사는 계급사회보다 더한 지독한 마인드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부터 생각해왔던 것이 하나 있다. 지금도 이 말은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말 중 하나이고, 소중한 가치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계급이 나를 대변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이에 비해 나에게 무거웠던 계급장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되뇌었던 말이고,



지금은 나이에 비해 너무 가벼운 내 계급을 멸시하지 않기 위해 되새김질하고 있는 말이다.



이 계급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일지언정, 결코 이 계급이 나를 증명해 주지 않다는 것을 아주 이른 나이에 깨달았고, 그것이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하게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무능했던 상관, 그리고 계급에 따라가지 못하는 능력, 그리고 그 계급으로 억누르던 사람들이 매일같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 회사가 무서웠던 것 중 하나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앞질러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유독 막내 계급에 대한 멸시와 하대가 심했다.



이유는 거창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되니까



나의 막내 생활은 처음에는 주변의 동정을 받았었다.



무서운 사람이 사수였으니까, 나 대신 무서운 사수와 함께했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나를 동정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멘토가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굳이 나에게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을 때는 내가 못해서, 내가 잘못해서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딱히 생활하면서 잘못하거나, 못 했던 것도 없었고,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무언가 지적 거리가 없을 때는



생활이나 태도를 문제 삼는 경우로 번지는 것을 보고는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했다거나,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만한 사람을 발견했을 뿐인 것이고, 그래도 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르는 선배들도 수두룩했고, 그런 선배들에게 지적이나 잔소리를 하지 않는 멘토를 보면서 모순을 느끼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내가 가장 무섭다고 느끼는 것은 따로 있었다.







너도 그렇게 하잖아




막내 생활이 길어질수록, 내 업무가 늘 거라고 생각했지만 적극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업무 실력은 늘지 않았다.



누군가의 판단을 기다리기만 해야 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런 도중에 선배들도 업무가 늘지 않았고, 업무 특성상 특정한 상황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어제와는 다른 일들이 터져 나왔는데 이런 상황을 적응하기도 벅찼던 나한테 가장 무서운 것은



선배들의 태도 변화였다.



처음에는 선배들이 그렇게 태도가 변한 것은 내가 잘 못해서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선배들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제각각으로 같은 상황에서 다른 말을 해왔다.



나이가 지긋한 선배들은 내 사수가 나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보고 금방 배웠다.



쉽게 투정하고 쉽게 탓하고 쉽게 짜증을 냈다.



사수가 나에게 그렇게 할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그냥 침묵하거나, 딱히 어떤 반응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상황을 목격한 선배들은 나에게 사수가 하던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본인들의 게으름과 나태함과 매너리즘으로 일어난 상황에 대한 탓을 나에게 전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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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나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전염되어갔다.


다른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막 대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고민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주변에서 휘두르는 데로 할 생각일 뿐이구나'



무서웠다.



의지하고 믿어야 할 선배들에 대한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내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받는 대우는 변하지 않았다.


내 능력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문화가 이랬을 뿐이구나, 나는 어느 순간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만두었다.



그냥 아무 일 없이, 그저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우선이 되었다.



발령 후 6개월도 되지 않아 내가 잘해야겠다, 멋진 동료 후배가 되어야겠단 생각은 사라져 있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퇴근만 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위기는 쉽게 전염되었다.







약자의 말


세상은 언제나 약자에게 부단한 노력과 성실함을 요구한다.

그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그 결과도 본인의 몫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과 그때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에 따라도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막내 때 동기들끼리 종종 이야기를 했을 때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나만 이 팀에 있었기 때문에 이 팀에 있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괴롭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괴로워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함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고 의지할 곳이 없어 넘어지기도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로 갈등이 생기거나,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들로 욕을 먹는 상황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사람들의 추악함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나와 같은 막대들에게 모여들었다.


별것 아닌 작은 것들을 툭 흘려 넣었을 뿐이지만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프고 가혹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못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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