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적이 있었다.
그랬을 때 나는 배가 늘 고팠다. 실제로도 배가 고프기도 했다. 사람은 결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 반면 끊임없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후자였다.
밥을 먹어도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기에 먹는 날들이 이어지던 중 물리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정신적인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외로움'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제목에 적었던 것처럼 '성취'에 대한 배고픔.
어떤 목표를 갖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의 시간을 보내고, 그 과정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시간 혹은 공간에서 목표를 달성한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성취'의 정의였다. 성취의 대상은 특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이라면 시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취준생이라면 취업, 직장인이라면 프로젝트 완수나 승진 정도가 될 수 있겠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성취를 하는 경험들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무엇이든 해보자 싶어, 긴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운이 좋으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간신히 찾은 성취의 대상은 이런 것들이었다. '공모전 무작정 참가하기', 'SNS 이벤트 참가하기' 등.
공모전에 참여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공모전이라고 해봐야 글을 적는 것 정도 뿐이었다. 다행히 다양한 공모전에 나갔고, 여러 군데에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전의 다양한 경험들이 공모전의 글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에게도 신기하게 다가왔다. 2019년 연말에 대상 하나, 특선 하나, 입선 하나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성취'에 대한 욕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SNS 이벤트 참여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나는 몰랐다. 이러한 이벤트를 참여하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줄은. 그들만의 세계는 너무나 공고했다. 동일인으로 보이는데 몇 개의 계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이 받은 이벤트 상품을 자랑하는 계정까지.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뭔가 꾸준히 하면 성취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일단 '참전'은 하였으나, 이 또한 열정이 있어야 했고, 당장의 생계를 해결할 수단이 있어야만 했다. 몇 건의 이벤트에 당첨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성취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다. 오히려 이벤트 참여는 마음에 더 큰 상처만을 남겼다. 공공기관에서 이벤트를 대행할 업체를 선정하고, 그 업체가 이벤트를 진행하는데 업체와 참여자 간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발각이 되어 다시 이벤트를 진행하는 일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랜덤'이기에 '차라리' 공정하다고 생각했던 이벤트 생태계도 현실 세계와 너무 닮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벤트와 멀어졌다.
그렇다고 지금, 아무런 이벤트를 참여하고 있지 않냐? 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책과 관련된 이벤트는 (내가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면) 신청한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도 아주 작으나마 '성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글이 나왔다. 가만히 앉아, 내가 요즘 이룬 성취들이 무엇일까 생각을 하다가 (성취한 것이 명확하게 있다면, 이런 생각도 안했겠지.) 책과 관련해서는 뭔가 이뤄내는 것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고작 그런 것들이 성취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은 문장. 내가 스스로에게 말한 문장이 나를 지금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들었다.
성취가 고프다. 일정을 잡고, 평가를 받고, 성취에 대한 경제적인 형태든 정신적인 형태든 보상을 받고 싶다. 과거에 했던 것처럼 공모전에 나가거나 이벤트에 참여해서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성취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지탱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강처럼 넓고 크게 흐르면서, 삶에 끊임없는 자양분을 주는 성취가 하고 싶다.
성취. (그러고보니 이렇게 글을 한 편 적어내는 것도 성취라면 성취겠네.)
어디 성취를 파는 식당이 있으면 곱배기로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