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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십이page Mar 23. 2023

수치심

무의식 억눌려 있는 감정이 수치심이었다.

나는 두 딸의 엄마다. 참 운이 좋게도 두 아이 모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다. 다만 내가 마음공부 중이라  딱 하나 거슬리는 게 간헐적으로 올라오는 우리 둘째 딸의 부정적인 감정이다.


오전 11시, 회사에서 큰 행사가 있어 정신없는 와중에 둘째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엄마... 엉엉엉... 언니가... 엉엉엉.."

행사장인 데다 숨넘어가며 우는 소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언니를 바꿔달랬다.

"희야, 벨라  왜 우노? 무슨 일이고!"

"벨라랑 배드민턴 치는데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벨라가 너무 속상하다고, 이 기분이 학원에서도 계속 올라올 것 같다고 오늘 학원 안 가고 싶다고 해요.."

너무 정신없이 바빠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둘째는 오늘 학원 안 가도 된다고 했다.

행사가 일찍 끝나서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혼자 집에 있던 둘째 아이가 반갑게 맞아줬다.

"벨라야, 오늘 뭐가 그리도 속상하길래 울면서 전화했어.."

"언니랑 배드민턴 치는데 자꾸 나한테 짜증 내고 놀리는 것 같아서 울었어요"

낮에 일이 생각나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얘기한다.

이렇게 둘째 아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그때그때 훌훌 털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 공부하는 나에겐 늘 숙제와 같은 일이었다.

"벨라야, 그때 속상했던 부정적인 감정은 그냥 훌훌 털어버려. 계속 생각하면 벨라만 괴롭고 힘들잖아.. 지금도 말하면서 울잖아.. 아직 그 안 좋은 감정이 계속 남아있어서 그런 거야.. 그냥 변기에 넣고 물 내려버려. 그냥 흘려보내라고...!"

초긍정적인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버렸다.

커진 목소리에 아이도 살짝 놀란 듯 다음부턴 해보겠다고 했다.

개선이 되지 않는 반복된 상황에 좀 지쳤는지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저녁준비하러 부엌으로 갔고, 신랑이 퇴근하고 집에 왔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평소와 다른 눈빛이다.

신랑은 저녁식사 중에도 별 말이 없는데 갑자기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이  딱 멈췄다.


 '아 맞다. 설마 형석(신랑친구. A기업 B부서팀장)이가 내가 얼마 전 A기업 A부서 사무보조(계약직) 채용공고 넣은 거 신랑한테 얘기한 건 아니겠지.. 근데 에이 설마 대기업에다 부서도 다르고 사무보조계약직 채용을 다른 부서 팀장이 어찌 알겠어?! 그건 아닐 거야'

사실 떨어지면 쪽팔려서 채용공고 넣은 걸 얘기 안 했었다.

그리고 대기업 차장 출신이면 A기업 사무보조 계약직에는 당연히 채용될 줄 알았는데 기다리던 합격 발표가 나질 않아 얼마 전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니 재공고가 떠있었다. 이것은 기존에 올렸던 채용공고의 지원자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이 몇 명 없어 재공고를 올린 거라고 네이버의 어느 글에서 봤었다. 재공고가 떠있었던 상황이라 결국 불합격이구나하고 잊고 있었는데 신랑의 눈빛 하나로 말도 안 되는 부정적인 잡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헬스장에 가는데 헬스장 가는 길과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동안에도 그 생각은 멈추질 않았다.

'뭐야, 진짜 내가 넣은 걸 형석이가 안 거야 뭐야.. 에이 설마 부서가 다르고 공채도 아닌데 무슨 관심이 있어서 알겠어'

운동을 마친 후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는데 둘째 아이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그냥 변기에 넣고 물 내려버려!'

좀 전에 둘째 아이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한 얘기인데 신랑의 눈빛 하나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며 3시간을 나를 괴롭히지 않았는가, 그토록 관찰자가 되어 나의 감정을 살펴봐야 한다.. 그냥 훌훌 털어버리자.. 매일 같이 마음공부하던 나인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스스로 상상하며 괴로워하지 않았는가.. 나의 억눌려있는  무의식 속 감정 "수치심"이 이번 마음공부의 과제인가 보다. 샤워장에서 나만의 깨달음을 얻고 샤워 후 개운한 마음으로 밖에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랑이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나 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혹시 자기 A기업 A부서 사무보조 계약직에 서류 넣었나?"

'헐........'

'나 뭐야.. 이 정도면 도사 아닌가.. 눈빛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니...'

"어.. 왜.. 넣은 지 좀 됐다.."

"형석이가 이 말 안 하려고 했다는데 얼마 전에 A부서 팀장이 찾아왔대. 페이지 씨 아냐고."

사실 신랑과 나는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이고 형석이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뽑을 수가 없다고 했대. 그래서 형석이가 그 팀장한테 대기업에서 차장까지 하고 유능한 인재였다고  일도 잘하는데 면접이라도 보시죠? 했는데 나이가 많아서 안된다고 했다네."

신랑의 말보단 얘기를 끝난 후 나를 아련하고 측은하게 보는 그 눈빛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미 수치심을 충분히 인정해 준 터라 더 이상 수치심이 올라오진 않았는데 현실의 벽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나의 억눌려있는 감정인 수치심을 느껴주고 인정할 수 있게 해 준 A기업 A부서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또 한 번 자기계발의 열정을 북돋아 준 A기업 A부서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진짜로 비꼬는 게 아니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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