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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이버스 Mar 01. 2017

4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개와 시계바늘과 5번 행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밀란 쿤데라

쿤데라 쿤데라 드디어 쿤데라의 책을 읽어봤다.

도대체,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까. 

그들의 삶은, 혹은 사고 체계는 어떤 프로세스를 타기에 이렇게 광활하게 펼쳐져서 송알송알 맺혀있을 수 있는 거지.


책 한 권을 통해 4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개와 시계바늘 그리고 5번 행성의 시점을 보았다.

그리고 더 더 더 많은 쿤데라의 사고의 실타래들을 보고 보고 또 보았다.


너무 기대하고 집어든 책이라, 세러머니로 표지 그림(르네 마그리트–The Man in the Bowler Hat, 1964)부터 그리고 시작했다능 -ㅠ-




106 -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흘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현기증은 사실은 욕망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어지러움증, 불편하다고 느꼈던 감정도 사실은 은연중의 욕망이었을 수도 있잖을까?!
매우 신선한 문제제기!



114 - 이 그림은 망친 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맘에 들더군. 그 공사장이 진짜가 아닐 뿐 아니라 눈속임 용으로 그려 넣은 낡은 무대장치 같았고, 붉은 물감 자국은 찢어진 틈 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틈을 확대해서 그 뒤에서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놀이를 시작했어. 그런 이유로 내가 그린 첫 연작을 무대장치라 불렀던 거야. 물론 아무도 내 그림을 보진 못하게 했지. 보았다면 나는 퇴학당했을 거야.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 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 모든 작품이 예나 지금이나 실은 항상 같은 것을 말하며 두 주제, 두 세계의 동시적 만남이자 마치 이중노출로 탄생한 사진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 풍경, 그리고 뒤에서 투명하게 비치는 불 켜진 머리맡 램프. 사과와 호두와 불 켜진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려진 서정적 정물화 너머로 그것을 찢는 손.

이런 것 너무 좋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 
그 정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앞은 거짓이고 뒤에 숨은 것이 진리.
석탑 속에 숨은 보물, X-ray로 보면 여러 번 겹쳐 그린 거장의 걸작,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사물을 표현한 조각품.
그리고 긁어서 나타나는 숫자 속에, 미칠 정도의 열광과 가벼운 실망이 함께 기다리고 있는 복권.... 으응?



131 - 카레닌은 스위스로 가는 것을 한 번도 탐탁하게 여겨 본 적이 없다. 카레닌은 변화를 싫어했다. 개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게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시간의 흐름도 하나가 지나면 다음 것으로 가는, 점점 멀리 앞으로 가는 쉼 없는 운동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은 손목시계 바늘처럼 원운동을 했다. 시계바늘 역시도 미친 듯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궤도를 따라 하루하루 시계 판 위에서 원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 그의 시간 감각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었다. 마치 쉴 새 없이 시계 판의 숫자를 갈았을 때 시계 바늘이 겪는 혼돈 같은 것이었다. 

카레닌은 테레자의 개다. 
우리는 개의 인지 세계를 알지 못한다. 개는 하루하루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개에게 시간은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원궤도를 끊임없이 도는 것일 수 있다.
개에게 또 공간은, 관계는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 걸까.



156 - 배신. 우리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소설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모든 스토리에서는 세상을 향해 한 발 배신의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을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줄 밖으로 나가는 도전, 다른 말로 배신을 해야만 다음 세계를 접할 수 있다.
토마시도, 테레자도, 사비나도, 프란츠도 한 발씩 내디뎠다. '도전'보다는 '배신'이 좀 더 어울리는 방향으로.



201 -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한편,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때론 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부터 강렬한 이 글귀에는 어떤 깊은 이야기가 숨어있었는지.
물처럼 흐르기도, 구질구질하게 엉기기도 한 네 주인공들의 관계도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을까?
나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어떤 경험이었을까. 인간(타인 & 나)에 대한 실망?



337 - "나는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 행복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야." 달리 말하자면 그녀는 그의 시적 기억의 문을 노크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은 닫혀 있었다.

-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은유와 함께 찾아온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생각해보자, 정말 사랑은 항상 은유와 함께 찾아왔다. 



360 -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5번 행성. 5번 행성이라고. ㅎㅎ
하지만 쿤데라는 "Einmal ist keinmal : 한 번은 없었던 것과 같다(독일 속담)" ,
계속해서 '한 번 사는 것은 전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한다. 
궤변 같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한 번 살 인생, 왜 우리는 맘껏 살지 못하고 있을까.



560 - 안갯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슬픔은 행복과 항상 함께한다. 종착역에 와서 슬프지만, 함께 있기에 행복하다.
슬픔이 행복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슬픔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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