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에 담은 나의 플레이리스트

붙잡고 싶은 기억들

by 초록테이블

어린 시절에는 나만의 음반을 직접 만들어 듣곤 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우연히 꽂히게 되는 음악을 발견하면 그 노래를 간직하기 위해 카세트 플레이어와 공테이프를 준비했다. 방문을 꼭 닫고,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DJ의 곡 소개가 끝나면 녹음버튼과 재생버튼을 꾹 눌러서 녹음을 시작한다. 그렇게 마음을 울리는 곡들을 차곡차곡 담아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나만의 음반을 완성했다. 음반의 이름은 '1993 가을' 같은 것으로 짓는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내 취향은 '슬픈 발라드'와 가까웠는데 특히 노래 가사에 심취해 좋은 가사를 받아 적곤 했다. 물론 노래 가사는 녹음한 음악을 재생-멈춤-재생을 반복하며 한 줄씩 써 내려갔다. 지금 그 모습을 떠올리니 마치 듣기 평가 같기도 하고, 필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슬픔에 잠겨 한 단어씩 꾹꾹 눌러썼던 곡은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이 세상 살아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우린 얼마나 서로를 아쉬워하는지

뒤돌아 바라보면 우리 아주 먼 길을 걸어왔네

조금은 여위어진 그대의 얼굴 모습 빗길 속을 걸어가며 가슴 아팠네

얼마나 아파해야 우리 작은 소원 이뤄질까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난 포기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에 후횐 없겠죠

어렵고 또 험한 길을 걸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초등학교 저학년이 노래 가사를 이해했을 리가 없는데, '난 포기하지 않으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는 가사만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너무 슬퍼져서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른들의 사랑은 왜 이리도 구구절절하고, 안타깝고, 이별이 가득한지 이상하고 궁금했다. 이렇게 내 테이프는 윤종신, 신해철, 윤상, 전람회, 김현철, 푸른하늘 등으로 채워졌다.


CDP가 나오고 MP3가 등장해도 고등학생 시절까지 녹음테이프는 쭉 함께 했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고, 친구에게서 정성스럽게 만든 녹음테이프를 선물 받은 적도 있다. 그 당시에는 무척 충격을 받은 일인데, Take Five였나? 서태지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테이프 앞뒤로 빽빽하게 한 곡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래도 안 좋아해?' 같은, 어떤 광기가 느껴졌던 일화다.


그래도 그때는 세상이 넓었다. 넓디넓은 라디오라는 들판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듯 좋아하는 음악을 겨우겨우 찾아야 했고, 친구들과 서로서로 내가 듣는 음악을 소개하고 쉬는 시간이면 이어폰을 나눠 끼고 감상했다. 내 취향인 음악을 무궁무진하게 곧바로 찾아주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때는 다 들어보고 나서 내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가수의 이름을 노트에 적어두고, 겨우 들은 가사 몇 줄로 노래를 찾는답시고 친구들 앞에서 불러댔다. 가요톱텐을 보고 와서, 별밤 라디오를 듣고 와서 어제 어떤 노래가 나왔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아끼고 채워나가던 그런 순간들이 모여있기 때문인 것 같다.


(+) 수십 년이 지난 후,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신해철의 LP를 샀다. 여전히 좋아서 좋다.

(+) 어젯밤, 어릴 적 듣던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역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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