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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렘 Sep 19. 2022

내가 알밤을 줍지 않아서

엄마의 기억을 주웠다 

하루종일 몸이 늘어져 소파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오후 두 시간을 보냈다.

계획대로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뜨면 생각보다 몸이 가뿐하고 오후 시간도 나름 생산적이었다고 

자부할 만큼 살아낼 수 있는데, 아침 기상 시간이 늦어져버리면 이상하게 하루 종일 몸이 무겁다. 

전형적인 올빼미 루틴으로 살아온 내가 2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져버릴 줄이야. 


자막 작업을 하기 위해 미리 읽어두어야 할 전기를 읽으면서, 

소파에 드러누운 게 찌뿌둥한 오후의 발단이었다. 

솔직히 책 그것도 전기를 읽으면서 소파에 눕는다는 건 그냥 자겠다는 거지. 몇 번 책을 얼굴 위로 

떨어뜨릴 뻔 한 모험을 하고 나서야 포기하고 그냥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자는 것도, 읽는 것도, 꿈을 꾸는 것도 아닌 애매한 시간을 두 시간 보내고 나니 

세상 상종 못할 인간이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들었다. 집을 나섰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늘은 오전에 요가를 다녀왔으니, 기존 코스보다 조금 더 짧고 가볍게 

걷고 내려오려고 했는데, 걷다 보니 성에 안 차 결국 한 시간을 당당하게 걸었다.

대낮의 숲길 산책로에는 적나라한 사람들이 걷고 있다. 

 


에어팟을 꽂은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걷는 하얀 셔츠 차림의 여자, 

연회색 운동복을 맞춰 입고 다정한 듯 무심한 듯 보폭을 맞춰 걷는 50대쯤 되어보이는 남녀 


(이상하게 이런 분들을 보면 나는 '저들의 수입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물음을 반자동적으로 떠올린다. 

10년 전 서울에 올라와서 자취방을 구할 때, 그 원룸 주인 아저씨 내외가 딱 저 연령대에 저런 모습이어서 

그런지 대낮에 산책을 하는 중년의 부부를 볼 때마다 '저들은 원룸 빌라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원룸에서 나오는 월세와 기타 소득으로 낮에 굳이 일을 나가지 않아도 꽤 괜찮은 생활을 하겠지'하는 

근거 없는 상상을 끊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한심하다.) 


숲길임에도 양산을 받쳐 들고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내놓은 채 타박타박 걷는 여자, 

몇 발짝 안 가서 킁킁대고, 또 몇 발짝 안 가 킁킁대는 반려견을 통해 인내라는 인생의 쓴맛배우고 있는 청년, 

바퀴는 달려 있지만 스스로 앞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이상한 볼보에 타고 있는 어린 남자애, 그리고 그 모순적인 자가용을 뒤에서 밀며 오르막을 오르는 할아버지 기타 등등. 


그들 또한 앞으로 앞으로 걸으며 초록색 모자를 눌러쓴 나를 곁눈질했을 것이다. 

'젊어 보이는데 일하러 안 가고 대낮에 이런 데나 걷고 있구만. 쯧쯧' 


한참 걷고 있는데 불과 30cm 앞쯤에 뭔가가 통, 하고 떨어졌다. 

알밤이었다. 

밤나무 아래 뾰족뾰족한 가시로 알밤을 보호하다가 처참하게 까발려진 밤송이들이 널브러져 있는 시기. 

그런데 가시옷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톡 하고 알밤만 마치 알몸처럼 떨어진 게 신기했다. '주워갈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탄력을 받은 다리가 떨어진 알몸의 알밤을 그냥 지나쳐버렸고 

그렇게 그 옆을 지나쳐가면서도 '뒤로 돌아가서 주워갈까' 생각했다. 

그러다 급기야는 '저게 뭔가 의미있는 알밤인데, 내가 주워가기를 바래서 딱 내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통, 하고 떨어졌는데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해서 못 주워가는 거 아니야? 내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선택의 순간들 앞에서 늘 망설였다.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러면 수동적으로나마 뭔가를 선택하게 되니까. 

하지만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분명히 있었다. 간혹 꽤 혹독했다. 

가장 빠르고 피부에 와닿는 대가는 '후회'였다. 

'아, 그 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할 걸', '그때 좀 더 물어볼 걸', '그때 좀 진상같아보여도 매달려 볼 걸' 


엄마를 간호하던 병원에서 나는 많이 했다, 후회를. 

엄마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후에 그 후회는 몇 년 간이나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착하고 고분고분한 딸 혹은 '김분순 씨의 어린 간병인' 말고 

좀 더 공격적이고 따박따박 질문하고 때로는 권리를 강하게 주장할 줄도 아는 

좀 '불편한' 간병인이 되었더라면 엄마가 수술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고,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라는 사람이 180도 돌변해 

한껏 불편한 간병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후회라는 놈이 그렇게나 질기고 호된 놈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대학교 3학년, 스물 한 살의 나는 너무 어리숙했다. 엄마를 지키기에. 지켜내기에. 


엄마의 간은 침묵의 장기라는 별명에 충실했다. 급격하게 간이 굳어갔고,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엄마에게는 아들 삼형제와 막내딸인 나 이렇게 사남매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나만 엄마와 혈액형이 같았다. 

내가 엄마와 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인지 판별하는 검사가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다. 

수면 없이 처음 받은 위내시경 검사에서 나는 호스를 물고 눈물과 콧물, 위액을 쏟았다. 

"그러시면 안 돼요, 그러시면 검사 못 해요. 뱉지 마시라니까요!" 

간 이식을 할 수만 있다면 그정도 고통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의식만은 그랬다. 


마지막 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밤. 

엄마와의 이별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닥쳐올 줄도 모르고 

낯선 서울의 병실에서 눈을 감고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내 몸은 엄마가 준 거잖아. 나는 엄마한테 내 몸에 있는 걸 다 줘도 괜찮아. 

줄 수만 있다면 나는 너무 기쁠 거야. 제발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줄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간경화가 진행되어 혼수상태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내 간이 엄마에게 적합하다는 판정이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이식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엄마가 떠났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아서 처음에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수술만 하면 되는데, 

나는 준비가 다 됐는데, 

왜 엄마가 없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장례를 치르고 

눈물이 범벅이 된 나에게 큰이모가 말했다. 

"느이 엄마가, 막내딸 몸에 칼 대는 거 싫어서, 얼른 서둘러서 갔나보다. 

간 이식 한다는 소리는 했는데 간 주는 사람이 너라고는 말 안 했거든. 언니 성격에 안 받는다고 할까봐.

그런데 그걸 또 어떻게 알고 그렇게 갔어,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 갔어.." 


내가 혼수 상태인 엄마에게 했던 말을 엄마는 들었던 걸까. 

나는 왜 그런 말을 엄마한테 한 걸까. 

엄마는 왜, 어떻게, 그렇게 떠난 걸까. 


엄마를 보낸 후 나는 한 번도 엄마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다. 

2010년 여름, 내 세상은 크게 소멸됐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와 자책만 했다. 

하루라도 검사를 빨리 받았더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게 의사를 재촉했더라면,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걸 알기 전에 내가 좀 더 빨리 눈치를 챘더라면, 내가 병실에서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엄마가 늘그막에 얻은 늦둥이 딸이 아니라 믿을만한 맏딸로 태어났더라면,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더라면, 내가 엄마가 먹고 싶다던 재첩국을 어떻게든 구해왔더라면, 

내가, 내가, 내가... 


12년이 지났다. 

지난 달에는 엄마의 기일이 있었다. 나는 조화 한다발을 사서 묘원에 들렀다. 

엄마를 보내고 12년을 살아왔다니. 꿈만 같다. 

처음 몇 해는 얼른 깨버리고 싶은 악몽같더니 

이제는 엄마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소멸된 세상을 조금씩 재건하고 있다.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는데, 따라가지 않았다.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 발치 앞에 떨어진 알밤을 줍지 못한 나의 수동성이 12년을 살게 한 걸까. 

내가 줍지 않은, 잘 여문 알밤은 산책길에서 종종 만나는 새까만 청솔모의 밥이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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