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증명서 그리고 나를 지킨 따뜻함

이별을 살아가다.

by Green

공적인 응답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실은 그저 감정을 뺀 돈 이야기일 뿐이다. 심지어 신혼집 구매와 관련된 원금을 조금이라고 깎으려는 치졸한 내용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문자가 오면 알림 창에 뜬 이름만 보아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렘 아닌 공포 때문에. 심장이 빠르고 크게 뛰는 것도 모자라, 그의 연락 아닌 다른 이유로 핸드폰을 확인하려고만 해도 가슴이 쿡쿡 찔리고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무서웠다. 나에게 어떤 칼을 꽂을지, 또 어떤 반박으로 몰아세울지, 어떤 비난으로 거절할지, 어떤 공격으로 나를 두려움에 빠지게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신체 반응으로 나타나는 공포감을 줄이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된 그의 이름을 아무 상관없는 이모티콘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에게 오는 유일한 창구인 문자 알림도 껐다. 이제 내 일상을 침투하는 문자가 아닌, 서류로 통보만 하기를 택했다.


이전이었다면 내가 헤어지자 하고 상대방이 붙잡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그도 나도 지쳐 “그만하자”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결국 그가 성질 다 내고서라도 돌아오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내가 종료를 선언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좋아했든 못났든 내가 알던 사람, 내가 정성을 쏟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 연락을 주고받는 이 사람은 내가 경험한 적 없는 낯선 타인이라는 사실이 매섭게 아팠다.


그는 내게 언제까지 짐을 빼라고 재촉하면서도, 정작 언제까지 돈을 주겠다는 확답은 없었다. 본인이 굳이 사고 싶다고 해서 샀던 고가의 가전제품을 주말부부라 10번도 써보지 못한 내게 떠넘기며 감가상각을 논했다. 갚을 생각이 없는 건지 상환 기한을 넘길 시 발생하는 법적 이율조차 깎으려 했고, 남이 된 마당에 우리 가족이 지원해 준 자금을 무기한 무이자로 쓸 심보까지 보였다.


결국 나는 ‘내용증명서’라는 멀게만 느껴졌던 법적 조치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화해하길 바랐는데 그게 안 돼서 소통만이라도 하길 바랐고, 그게 안 돼서 그저 기다렸고, 그게 안 돼서 원만하게 조율하길 바랐는데 말이다.




선한 마음을 이용하는 듯한 그 사람은 더 이상 자비를 베풀 대상이 아님을 인지했다. 한 자 한 자 타이핑을 하며 내용증명서를 작성했다. 읽고 또 읽으며 그에게 비난받을 것 같은 문구를 검열하다가, ‘그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몇 시간에 걸쳐 써낸 2장의 내용증명서를 들고 우체국에 갔다. 내 두 발과 다리로. 힘 있는 발걸음으로. 더 이상 그의 바람대로 움직이던 내가 아니니까.


종종 이직 원서를 내기 위해 방문했던 우체국인데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중대한 결정을 위해 그곳에 섰다. 때마다 이목구비만큼 분명한 목소리로 원서를 받아주시던 직원분이 내용증명을 보내겠다는 날에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맞아주셨다. 슬쩍 보면 보였을 내용증명서 안의 불편한 단어들에도 그분은 아무 티 내지 않고 이전과 같았다. 내 슬픔을 아는 척 하기보다 담담하게 스스로 해내는 용기를 실어주는 게 필요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우체국 직원의 친절한 미소와 한결같은 목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간인과 도장을 찍고 나서 봉투에 서류를 넣어보니 생각보다 작아서 난감해하고, 풀이 없이 봉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그녀는 지체 없이 도와주었다. 우체국에 들어섰을 때 표정 그대로 그저 ‘뭐라도 도와줘야 될 것 같아서’라고 말하며 튀어나온 종이를 접고, 테이프를 붙여 봉해주었다. 그 손길이 그냥, 따뜻했다. 이 상황을 겪고 있는 나조차 나를 불쌍하고 안쓰럽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그렇게 보지 않는 듯했다. 홀로서기의 여정을 떠나려는 내 옷매무새를 잡아주고 토닥여주는 듯했다.


타인의 작지만 따뜻함 덕분이었을까. 문득 그 사람의 외로웠을 인간관계가 떠올랐다. 그와 더 없는 관계였던 시절, 문득 그의 인간관계가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었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외면하고 자기에게 몰입하는 그의 방식이. 그럼에도 그러한 사람이 나와는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 냉정한 선이 언젠가 나를 향해 그어질 수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깊은 상실과 슬픔을 겪었지만 이 일을 헤쳐 나가며 나에게 진정으로 따뜻한 사람들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없는 귀한 사람들이 있다. 그 경험들이 깊은 슬픔 속에서 벗어나는 발돋움이 되었다.



고통의 너를 떠나 이젠 따뜻한 이들에게로 가며, 쇼팽 에튀드 Op.10 No.3 이별의 곡 https://youtu.be/eLb2oln-siA?si=b72Ysp7a-JCznE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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