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끝을 대하는 자세

이별을 살아가다.

by Green

그와의 갈등 8주, 최종적으로 관계 종료에 동의하고 30일 만에 짐 반출, 그리고 환수가 이뤄졌다. 뻔히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었는데도 숨이 턱 막혔다.


마지막까지 그는 자기 편한 대로였다. 내게 보낸 문자에는 ‘상호 협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일방적인 협조만을 바랐다. 준비해 두겠다던 말과 달리, 도착 시간에 맞춰 현관 비밀번호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그가 이미 짐을 빼고 나간 빈 집. 나는 아파트에 들어서기도 전에 한껏 예민해졌다. 문이 열리고 마주한 풍경은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전문업자의 손길을 거친 듯 깔끔하게 구간별로 비워져 있었기에.


크게 숨을 내쉬고 짐을 빼기 전 집안을 훑어보니, 내 소유의 물건 중에 자기 이익 또는 판단에 따라 챙겼는지 소형가전과 소품들이 없어진 게 보였다. 반면에 장식장 안의 활짝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과 앨범들은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 부모님의 지원으로 채워 넣었던 살림살이들과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부부였던 탓에 정작 내 손때는 묻지 않은 것들. 나는 그것들을 챙기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끝을 내야 하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미련 없이 잘라내는 의식이었을까. 사실 두고 온 것을 아주 잠깐은 아까워했다.


그럼에도 내가 두고 오지 않고 챙겨 온 게 있었다. 결혼서약서. 그가 어떻게 처리할지도 모를 그 귀한 약속을 나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종이’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서약문을 보며, 나의 감정을 우선시하느라 그를 존중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했던 어느 날의 기억이 더 씁쓸히 다가왔다. 이렇게 끝이 나는 관계임에도 나는 그날들을 후회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후회하며 없던 일로 여기지 않을 것이기에.


짐을 뺀 직후부터 나는 그의 연락을 보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하루가 지나 핸드폰 알림 창에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떴다. "입금했습니다." 그뿐이었다. 우리 관계 정리에 대한 어떠함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그 사람이었다.


3년 반을 연애했고, 짐을 뺀 바로 다음 날이 우리의 '결혼 1주년'이었다. 결혼 후 가장 축하 할 기념일 하루 전날, 가장 허무한 돈거래로 끝난 우리. 그가 직접 지정한 그날, 마지막을 대하는 그 자세는 그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너로 인한 고통은 끝이다.


결혼의 숭고함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과 자기 자신만 우선으로 택한 이와의 결말을 닮은,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Op. 32, No. 12 https://youtu.be/1zVL4tG2OnE?si=YKZu_rZUQWOW_w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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