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고 채우기 위한 선택, 휴직
20대를 돌아보면 2번의 대학 입학, 해외 봉사, 각종 프로젝트, 학회와 동아리 활동, 3번의 인턴십, 졸업 후 칼취업, 그리고 결혼까지 '무언가를 하는 선택'으로 가득 채웠다.
빽빽한 스케줄과 다음 방학, 학기 계획은 '열심히 사는 나'를 증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냥 쉬거나 흘려보내는 시간이 없이 늘 새로운 도전을 하는 내 모습과 사람들의 대단하고 멋있다는 인정이 좋았다.
생산성과 효율성에 대한 집착은 어찌나 심한지. 하루에 꼭 한 개 이상은 '효율적인 일'을 해야 마음이 편했다. (하다못해 방 청소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만 내 가치가 증명된다고,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2021년, 첫 직장에 입사한 후에도 여전히 '열심히 병'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밤낮없이 프로젝트 회의를 하며 쉼 없이 달리던 대학생 때와 달리 '퇴근'이 생겼다. 운동을 시작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 생활도 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맘 편히 잘 쉬게 되었거나, 효율적이지 않은 나를 너그럽게 포용할 정도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직장생활 5년 차가 되었다. 늘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열정적이었던 대학생 시절의 나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해야 할 일만 간신히 하며 회사가 주는 안정적인 월급과 편안함이 좋아 머무르는 현실 직장인이 되었다. 일을 적당히 하니 크게 지칠 일은 없었다. 가끔 사람과 프로젝트, 고객에 치여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진 않았으나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급여와 유연한 근무형태를 생각하면 다니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안정적이지만 열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직장 생활을 지속하던 중, 갑작스러운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았다. 정말 '갑작스러운'이었다. 부정 출혈 외에는 특별한 증상이 없는 암이고, 20대 발병률이 높지 않기에 부정출혈로 산부인과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의사 선생님도 단순 용종일 확률이 높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간이 조직 검사 결과 자궁내막암이 맞았고, 대학 병원과 큰 병원을 예약해서 진료를 받고 병원을 결정하며 검사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자궁내막암은 초기일 경우 예후가 좋은 편이고, 호르몬 치료를 받는다면 약물 복용과 3개월마다 한 번씩 소파술을 받아 회사를 병행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암'이 주는 심리적 무게감이 큰 탓일까. 원래도 의욕이 크지 않던 일을 병원을 오가고, 약을 복용한 후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으로 병행하려니 '이렇게 하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멈추고 온전히 건강 회복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올라왔다.
아무리 암 진단 사실을 동료와 팀장님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심적, 육체적으로 지쳐가는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근로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이고, 그것이 매우 버겁게 느껴졌다. 주변 지인들이 암 진단 소식을 듣고 '휴직 안 해?'라고 묻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휴직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팀의 업무가 한창 바쁜 때이고, 치료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며, 휴직을 하게 될 경우 그 기간 동안 무급이라는 점이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겨우 버티듯이 일을 끝내고 도망치듯이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지며, 휴직을 조금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휴직을 한다면 어느 정도 하지?', '남편에게 부담이 크지는 않을까?', '휴직 기간을 어떻게 보내지?', '오히려 무기력 해지고 자존감도 떨어지는 거 아니야?'
가계부를 보며 이래저래 계산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남편의 월급으로 내가 휴직하는 기간 동안 생활을 지속하는 데에 문제는 없지만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혼 후 첫 2-3년이 돈 모으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데, 이 황금 같은 시기에 무급 휴직을 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과 걱정은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휴직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해야 할 이유가 명확했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었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며 치료에 전념하는 것. 당장 5-6개월 급여가 없다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내가 없다고 팀이 안 돌아가지는 않는다. 휴직 기간 중 심심하고 무료해질 때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의 문제다.
무엇보다 나의 20대를 돌아보니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책임질 것이 가장 적은 지금 나에게 멈춰가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루하루를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채워보는 경험을 하는 것, 시간의 구애 없이 천천히 밥을 준비하여 먹고, 치우고, 산책하는 것.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생각해 보는 것.
멈춤으로써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남편에게,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휴직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노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조언은 조언일 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멈추고 싶다. 앞으로 일할 날이 최소 20년은 더 될 텐데, 잠깐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서 소진되어 가는 몸과 마음을 질질 끌고 가며 일할 필요는 없다. 저축은 못하지만 살아갈 수는 있다. 그 생각만으로 회사에 휴직을 요청할 이유는 충분했다.
다음 주 팀장님과의 면담 시간에 건강 회복을 위한 휴직 의사를 밝히고자 한다. 사실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팀이 바쁘고 힘든 시기인 만큼 기간을 조정하거나, 줄여달라는 요청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는 내가 없어도 그 상황에 맞추어 어떻게든 돌아간다. 하지만 암 진단 초기 나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 일은 미룰 수 없다. 바로 지금 해야 하는 일이다.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선택을 단호하게 해보고자 한다.
솔직히 이 선택이 맞는지 100%의 확신은 없다. 어쩌면 조금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수없이 많은 '하는 선택'을 해왔다면 이제는 '하지 않는 선택'을 할 때다. 지금의 멈춤이 삶에서 어떤 시간이 될지 두려우면서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