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독고다이는 불가능하다

뜻밖의 동행

by 그린망고


아키를 다시 만난 건 사리아(Sarria)에서였다.


공립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고, 여느 때와 같이 동네 마실을 하던 중이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내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도중에 순례길 루트를 벗어나 산세바스티안과 빌바오를 다녀온 데다 몇몇 마을에서 연박을 한 탓에 생장에서 같은 시기 출발한 이들보다 한참을 뒤처져 있던 터였다.


멀찌기서 새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장신의 여성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안경을 쓰지 않아 흐릿했지만 특유의 걸음걸이로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라뇬(Grañon)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아키였다.


아키라면 하루에 나보다 훨씬 긴 거리를 걷고 있던 친구라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다. 아키와 잠시 동행을 한 적이 있는데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도저히 템포를 맞출 수가 없어 끝내 앞세워 보냈었다.


그런 아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사연을 들어보니 족저근막염으로 한 걸음도 떼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 이곳 사리아의 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며칠을 쉬고 있던 차였단다. 함께 걷던 일행이 모두 먼저 떠나 외로웠다며 나를 보더니 눈물이 그렁할 정도로 반가워한다. 무뚝뚝하던 아키가 별안간 소녀 모드로 돌변하여 다가서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나 역시 뜻밖의 인물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녀가 느닷없이 돌덩이 같은 한 마디를 던진다.


“나랑 산티아고까지 같이 가지 않을래? “


(WHAT?)

(응. 잘못 들은 걸 거야.)


​프란체스카와 작별하고 'Dobby is free'를 외치던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이다.


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거절해야 한다. 산티아고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고. 나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니, 견디기야 하겠지만 내적평화는 깨지고 말 것이다. 그동안의 여정과는 사뭇 다른 여행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세월아 네월아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지 못할 것이며 아무 때나 멈춰 서서 자유롭게 사진을 찍지도 못할 것이다. 길에서 만난 댕냥이들과 어화둥둥 우쭈쭈쭈 고시랑대며 맘껏 노닥이지도 못할 테지.


아, 괴롭다. 세상 차가웠던 여성이 전에 없던 장화 신은 고냥이 눈망울을 해서 들이대니 내빼기가 어렵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환자다. 어떤 말로 거절해도 어차피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 함께 사리아를 떠나기로 했다. ​





<사리아 공립 알베르게> 13세기 이탈리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진 '막달레나 수도원'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오전 7시까지 공립알베르게 앞으로 오겠다던 아키에게서 7시 10분이 지나서 문자가 왔다. 이제 일어났다고. 아키는 보통의 일본인과는 다르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당연히 시간 약속은 칼같이 지킨다. ​아키는 일본을 떠나 캐나다에 이민한 지 17년이 되었다. 일본이란 나라도 그곳의 사람들도 본인과는 맞지 않았단다. 다리 길이에 맞는 바지를 찾기도 어려웠다며 우스갯소리로 툴툴댄다. 아키는 170cm가 넘는 장신이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일본 여성이니 꽤나 눈에 띄었을 법한 신장이다. 뭐 여하튼 여러모로 답답했단다. 사실 나도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는 비슷한 마음이다.


​1995년 겨울,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일본은 처음이었다. 첫 도일(渡日)의 소회는 '흠, 일본은 나와는 맞지 않는 나라구나.'였다. 계절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추위를 원체 많이 타서 겨울을 몹시 싫어한다. 여하간 처음 밟은 일본이란 나라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차갑고 황량했다. 색깔로 말하자면 연한 잿빛이랄까. 지나치게 정돈된 모습도 어쩐지 불편하고 갑갑했다. 아마 그 해 여름에 갔던 태국과 비교가 되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딘지 좀 흐트러지고 빈틈도 숭숭 보이는 그런 자유롭고 헐거운 환경에 더 끌리는 듯하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아키는 여느 일본인과는 달랐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면도 그랬다. 그래서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7시 40분이 다 되어 아키에게 문자가 왔다. 알베르게 앞에 도착했노라고.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100km, 닷새 남짓을 아키와 동고동락해야 한다. ​

숨 막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떠나 온 순례길이었기에 이곳에서만큼은 온전히 자유하고 완전히 해방되고 싶었다. 편히 숨 쉬고 싶었다. 남의 일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고스란히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구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그런 시공간을 바란다는 것은 허황된 꿈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만나면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다행인 건 아키도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개들은 그닥이지만.


나는 인물 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다. 내 앨범엔 풍경이나 동물 사진이 대부분이다. 사진을 찍다 보면 걸음이 늦어져 아키는 항상 저만큼 앞서 있다. 아키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몸 상태가 안 좋은 탓도 있겠지만, 원래 사진 찍는 걸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대신 '100km 표지석 앞에서의 인증샷' 같은 류의 사진은 꼭 남기는 듯하다. 나는 그런 덴 별로 관심이 없다.

아키가 족저근막염에 걸리자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해졌다

아키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나는 그날그날 내키는 곳까지 걷는 반면 아키는 산티아고까지 매일의 루트를 이미 다 계획해 놓았다. ​나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의 사람이다. 그러나 아키와의 동행을 통해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되었다.


걱정한 바와는 달리 아키와 나는 서로에게 꽤 괜찮은 길동무였다. 자유에는 고독이 따르고 해방은 불안을 동반하기도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완벽한 독고다이는 불가능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