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오(Lusio)에서 만난 사람들 (3)
진풍경이다.
어제 종일 핸드폰을 붙들고 징징대던 여성이 거의 경보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프란체스카 말이다. 뭐지 저것은? 정신력이라는 것인가? 하루 만에 물집이 깜쪽같이 아물기라도 한 것인가?
노란 화살표가 보이질 않는다.
구글맵을 확인하고 도로변을 따라가려는데 프란체스카가 막아선다. 그쪽이 아닌 것 같단다. 일단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 본다. 흠... 저 길은 분명 어제 올라왔던 길인데. 그리로 가면 어제 지나온 트리아카스텔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보지만 단호하다. 무슨 근거로 그리 확신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어디 함 가 보자. 남는 게 시간인데.
그렇게 불빛 하나 없는 언덕을 한참을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린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사실 그리 될 줄 알았지만 실랑이하는 것이 귀찮았다. 실랑이랄 것까진 없었겠지만, 의견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는데 소모하는 에너지가 아깝다. 차라리 몸이 좀 고된 게 낫다.
어느새 사모스(Samos)에 도착했다. 출발지인 루시오(Lusio)에서는 6km 남짓의 거리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시간을 꽤 보낸 것 같은데 여전히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나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고 싶은데 너 먼저 가지 않을래? 마을도 좀 둘러보게."
"응, 기다릴게."
같이 둘러보자도 아니고 기다리겠단다.
그냥 다시 걷는다.
사모스에서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사모스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베네딕토회 수도원 중 하나인 '산 훌리안 수도원(Monasterio de San Julián)'이 있다. 수도원 뒤편으로 성인 서너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아담한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그 바로 옆에 수령 천 년이 넘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시프레스(Ciprés)'라는 예배당의 이름도 이 나무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그 고목이 보고 싶었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피 사이사이로 켜켜이 쌓인 세월이 전해져 경외감이 든다. 겨우내 앙상하던 가지 끝에 솜털 보송한 겨울눈이 꽃봉오리처럼 솟아오른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 생명력이 나에게도 옮아와 동면에 들었던 육신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여름형 인간인지라 봄소식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다.)
천 년 먹은 사이프러스 나무를 남겨둔 채 사모스를 떠난다. 어차피 오전 10시에나 입장할 수 있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 모를) 훗날을 기약해 본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한 동행인지 모르겠다.
악!
다리에 쥐가 난다. 뱁새가 황새를 좇으려니 근육에 탈이 날 수밖에.(프란체스카는 걸음만 빠른 게 아니라 다리도 길다. 쳇.) 연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차라리 잘됐다. 핑곗거리가 생겼다. 한참을 앞서 가고 있는 프란체스카를 불러 세웠다.
"나 다리에 쥐가 나서 아무래도 좀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아. 너 먼저 가는 게 좋겠다."
"응, 그래."
이번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뜻 수긍한다. 동이 트고 나니 혼자 걸어도 되겠다 싶은 모양이다.
아! 숨 쉬기가 편해졌다.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단잠을 자고 있는 누렁소들을 보고 있자니 맘이 평온해진다. 적막하기만 했던 세상이 새들의 재잘대는 소리로 분주하다. 저너머 어딘가 시냇물이라도 흐르는 모양이다. 졸졸졸 물소리가 시원하기도 하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었구나.
언덕 위로 반가운 해님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풍경과 나만이 오롯이 남은 순간. 소중하다.
나는 역시 혼자일 때 채워지는 인간임을 새삼 깨닫는다.
내가 상상해 온 순례길에는 개인적인 스테레오 타입이 투영된 몇 가지 장면이 있었다. 곧게 뻗은 양버들이 줄지어 서 있는 호젓한 오솔길, 떡갈나무든 밤나무이든 간에 가느다란 가지와 짙푸른 잎사귀가 얼키설키 맞닿아 머리 위로 동그랗게 아치를 그린 나무 터널,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지평선 너머까지 온통 커다란 하늘과 누릇푸릇한 들판뿐인 광활한 평원.
실제로 그런 길을 만났을 땐 '아, 내가 정말로 순례길 위에 서 있구나.'하고 감격에 겨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구닥다리 로드무비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벌려 낯선 이국의 공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손바닥으로 들풀을 쓸며 걷다 카르둔(Cardoon) 가시에 찔려 피를 보기도 했다. 그 순간마저도 마치 방추에 찔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된 양, 낭만에 취해 피가 다 말라붙도록 들판 위를 무아지경으로 걸었다. 뇌가 흐물흐물해질 정도의 황홀경이었다.
감성이라곤 건포도처럼 쪼글아들어 건조한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홀로 마주한 순례길 풍경은 내 안 깊숙이 숨겨져 있던 촉촉한 무언가를 건드려 다시금 움트게 해 주었다. 마른 가지 끝의 겨울눈처럼.
길 위에 오직 나 홀로 서 있는 풍경.
이런 한가로운 순례길은 오늘로서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사리아(Sarria)부터는 단풍철 행락객만큼이나 순례객으로 북적댄다고 하니, 무대 위를 제멋에 독주하던 모노드라마의 주인공 노릇도 이제 그만이다.
군중 속에서도 나만의 이너피스를 지켜낼 수 있길 바라며, 다가올 길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