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야반도주

루시오(Lusio)에서 만난 사람들 (2)

by 그린망고

쿠르릉쾅쾅 커커커허헉컥 드드륵드륵 풉푸르푸풉


천둥도 지진도 아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이 파괴적인 굉음과 온몸을 전율케 하는 육중한 이 진동의 진앙지는 바로 리카르도의 콧구멍이다.


내가 경솔했다.

도미토리는 청춘의 요람이라느니 코 고는 소리가 백색소음이라느니 함부로 떠드는 게 아니었다.


순례길에선 몸이 고단하다 보니 평소보다 코를 심하게 골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루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피차 녹초가 된 상태라 코 고는 소리 정도로 잠을 설치거나 하진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물론 가끔은 유난히 거슬리는 날도 있다. 그런 날에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으로 대부분은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독보적이다. 비교대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어디 지근에서 굴착기로 터널이라도 뚫고 있는 듯한 소음과 진동이다. 이어폰 따위는 무용지물이다.


일전에 말한 ‘토르가 강림한 듯한 코골이’의 주인공이 바로 리카르도였다.


이어폰을 낀 귀를 베개로 감싸 쥐고 저장해 둔 팟캐스트를 볼륨을 최대로 키워 들어본다. 소리라는 게 나오고는 있는 거니. 고막에 기별도 안 간다. 쳇 베이커의 음악도 오늘은 안식이 되어주지 못한다. 볼일도 없이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쭈그려 앉아본다. 계단을 한참 내려온 것 같은데 그의 비강(鼻腔)에서 호령하는 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아, 다리 저려.

춥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애벌레가 벗어놓은 허물마냥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침낭 속으로 기진한 몸뚱이를 구겨 넣는다.


어릴 적 엄마랑 같이 자다 코 고는 엄마의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본 적이 있다. 숨이 막힌 엄마는 ‘아푸푸푸’ 입으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버렸다. 리카르도에게도 한번 시도해 볼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양 오백 마리,,,,

피레네 산맥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던 양들이 떠오른다. 목동의 구령에 맞춰 양 떼를 일제히 제압하던 카리스마 넘치는 보더콜리 녀석도. 보더콜리는 천재견임에 틀림없다.



잠이 안 오니 별의별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뱅뱅 돈다.


나는요, 붕괴됐어요.

아, 이 공간에 더 있다가는 정말로 멘털이 붕괴될 것 같다.


나가자. 일단은 나가자.


어둠 속에서 최대한 소리를 죽여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한다. 짐은 엊저녁 미리 싸 두었으니 침낭과 배낭만 반짝 들고나가면 된다.


발가락 끝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문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뗀다.


한 발자국 채 내딛기도 전이었다.


"Excuse me! Are you leaving now?!"


(어머, 깜짝이야!)


나의 인기척을 느낀 프란체스카가 부리나케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야반도주하다 걸린 것 마냥 몹시 당황한 나는

"쉿!"

하고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입술에 대고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사방이 새까만데 보일 리 만무하다. 흠... 그래도 '쉿'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까. 'Shit'으로 들렸으려나.


"EXCUSE ME! ARE YOU LEAVING NOW?!!!"


내가 못 알아들은 줄 아는 모양이다. 뱃속 저 깊숙이서 끌어올린 듯한 대쪽 같은 발성으로 소리 높여 외쳐댄다. 얘, 너 웅변학원이라도 다녔니?!


망했다.

리카르도가 깨고 말았다.


로비에서 쪽잠이라도 자면서 아침이 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리카르도는 나와 아침에 함께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 코골이는 코골이고 약속은 약속이다. 그런데 모양새가 아주 요상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내빼듯 서둘러 방에서 나오자, 프란체스카가 기겁을 하며 따라 나온다. 마흔이나 먹은 여성이 어린애처럼 내 팔을 붙들고 같이 가자 애걸한다. 지금 떠나려는 게 아니라고 얘길 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당최 막무가내다.


잠이 깬 리카르도가 화장실을 다녀오다 우리 쪽을 힐끗 쳐다본다.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것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간다. 돌아버리겠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프란체스카는 이미 배낭까지 들춰 맸다.

얘야, 지금 새벽 4시 반이란다.






달빛 아래 오늘도 걷는다


그렇게 프란체스카와 나는 암흑 속을 걷고 있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희뿌연 달빛과 헤드 랜턴의 어스름한 불빛에 의지해 스페인의 시골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리카르도가 어제 운을 띄우긴 했었다. 코를 심하게 곤다고.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다. '코골이쯤이야 이미 수도 없이 겪어봤구먼 뭘.' 하고. 내가 리카르도를 얕잡아 봤다. 이 정도인 줄 알았다면 그 수많은 빈 방들 중 하나로 미리 도피라도 했을 텐데. 그랬다면 이런 난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에혀,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이 너무 찜찜하다. 코 고는 게 죄도 아닌데. 생리적인 현상을 어쩌란 말이냐. 나라고 자면서 방귀 한 번 안 뀌었을까. 풀이 죽어 방으로 들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은퇴한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보는 듯 딱하게 느껴졌다.


미안, 리카르도.

야반도주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응, 이건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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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