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을 바라보며 걷는다는 건 이렇게 멋진 일이었구나.'
스테인드글라스를 조각조각 맞춰놓은 듯한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갓난아기 머릿털마냥 보들보들한 밀이삭이 바람결에 한들한들 아지랑이 친다.
“아, 행복하다!”
순례길을 걸으며 늘상 입에 달고 살았던 말.
길 위에서 죽어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숨은 턱까지 차는데 신이 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조금 뛰어넘는 무언가에 도전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보다.
나는 혼자 걷는 게 편하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에 누군가 존재해 주면 안심이 된다. 고양잇과의 인간이라 그렇다. 그래서 날마다 길 위의 누군가를 길동무로 점찍는다. 찍힌 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섬뜩해할지도 모르겠으나.
시루에냐(Cirueña)에서 그라뇬(Grañón)을 향해 가던 날, 나의 길동무는 스위스에서 온 할머니였다. 양손에 스틱을 꼭 쥐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어찌나 경쾌하게 걸으시던지.
들썩이는 어깨가 귀여워 미소가 절로 난다.
'나도 저런 귀여운 할머니가 돼야지.' 하고 마음먹어본다.
마을이 보인다. 알록달록한 열기구가 아침 하늘을 수놓는다. 카파도키아의 열기구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시골 마을 위로 떠오르는 열기구도 충분히 낭만적이다. 어떤 풍경이든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특별해진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세상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독일에서 온 한 순례자는 다리가 불편한 노령의 반려견과 함께 걷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며 반갑게 꼬리를 치는 녀석.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니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온다. 존재만으로 감사한 생명체여. 이 차디찬 세상에 너로 인해 자그마한 온기를 느낀다.
어느 날 비얌비스티아(Villambistia)라는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서 프랑스 처자와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그녀는 3년 전, 교통사고로 골반을 크게 다쳐 장애를 얻었다고 했다. 그녀의 나이는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중도에 포기하게 되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얼마가 걸리든 저만의 속도로 걸어보려 해요.”
그녀의 용기에 등이라도 쓸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연하디 연한 청춘에게서 배운다. 삶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은 행동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했다. 그녀의 앞길을.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 중에는 은퇴자나 퇴사자가 유독 많다. 긴 휴가를 내기 어려운 사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생각을 하기 위해, 혹은 비워내기 위해 오는 사람들. 여든이 다 된 어르신,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온 사람도 있었다. 남미에서 온 자전거 순례객, 말을 타고 지나는 이들. 참으로 다양한 모습이다.
세상 곳곳에서 각자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이곳에선 모두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 단조로운 일과에도 지루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미소가 피어나고 소소한 감동으로 눈물이 흐른다. 고만고만한 걱정들은 이내 웃어넘겨 버리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한다. 누가 더 잘날 것도 못날 것도 없다.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모두 동지이자 친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