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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뇬(Grañón)에서의 특별한 하루

순례길 구름 컬렉션

by 그린망고

걷는 걸 좋아하지만 어디까지나 평지에 한해서다. 폐활량이 부실하게 태어나 촛불 하나 한 번에 끄는 법이 없다. 순례길에 오기 전 연습 삼아 하루 2만보를 걸었더랬다.


프랑스길은 첫날부터 피레네를 넘어야 하기에 지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웬걸.


기우였다.

'나의 특기는 걷기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잘 걸었다. 품 넓은 대자연을 뒷배 삼아 날마다 황홀한 풍경 속을 걸으니 어디선가 근원 모를 에너지가 솟아났다.


일주일쯤 지나니 몸이 완전히 적응했다. 20km는 무난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중독이 되나 보다. 멈추기가 싫은 날이 생겼다. 다가올 새로운 길들이 궁금해 ‘조금만, 조금만 더 걷자’ 하다 보니 40km를 넘기기도 한다. 도착지 마을에서 돌아다니는 거리를 생각하면 그 이상을 걷는 것이다. 그런 날은 다리에 모터라도 단 것마냥 속도도 엄청나다.


몸은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머리가 듣지를 못한다. 아니, 듣지를 않는다. 원체 뭔가에 꽂히면 어디 하나 못 쓸 정도로 망가져야 멈추는 인간이라 그렇다. 덕분에 허리고 눈이고 성한 곳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에 홀린 듯 몰두하고 있을 때의 그 행복한 충만감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렇게 거의 스무날 가까이를 지내다 보니 발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제서야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신선놀음하듯 게으르고 나태하게 순례길을 완주하자던 초심이 떠올랐다. 속도를 조절할 때가 온 것이다.


시루에냐(Cirueña)를 떠나던 날 아침 다짐했다. 오늘부터는 머리가 아닌 몸을 따르자. 몸이 멈추라 할 때 멈춰 서자.


그렇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모처럼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순례길을 걸으며 깨달은 게 있다. '구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다. 산마루에 살포시 얹힌 구름, 골목길 처마 끝에 걸린 구름, 막 튀겨낸 팝콘처럼 포슬포슬 알맹이진 구름, 손에 만져질 듯 대지 위로 바짝 내려앉은 구름, 육지를 삼킬 듯 세차게 밀려오는 쓰나미 구름, 비를 잔뜩 머금고 무지개를 내려주던 구름.


구름의 윤곽선을 따라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 커다란 귀를 나풀대며 꼬리를 바짝 들고 날아가는 강아지의 옆모습, 삐죽 나온 주둥이를 한껏 벌리고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솟아오르는 오리 녀석. 하늘에선 모든 동물에게 날개가 있다. 그래서 구름으로 그린 동물은 자유롭다.






그라뇬(Grañón)이란 마을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채 못 되었다.


볕이 잘 드는 노천 바르(bar)에 앉아 토스트를 먹으며 잠시 고민을 한다. 12km를 조금 더 걸었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더 걸을 것인가. 체크인 시간은 아직 멀었다. 일단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고 결정하자.


파로키알 산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게(Albergue Paroquial San Juan Bautista)

마을을 둘러보다 성당에 딸린 알베르게를 발견했다. 문이 열려있다. 빼꼼 들여다보니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모양새다. 마치 지하 던전으로 이어지는 입구인 양 스산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퀘스트를 깨듯 문을 하나씩 통과해 들어가니 익숙한 문자가 눈에 들어온다.


‘환영합니다. 순례자여!’



우리말 손글씨로 적힌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읽어보니 순례자를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다 같이 저녁을 준비하고 미사를 드린 후 뒷정리까지 함께 하는, 뭐 대충 그런. 내향형 인간인 나에겐 부담스러운 시간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 그게 바로 오늘이다.’

긴 망설임 없이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화살표를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니, 높다란 천장에 지붕의 목재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빈티지한 공간이 나온다. 회색 돌을 쌓아 올린 석벽 모서리엔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벽난로가 있고, 그 옆으론 호두나무 빛깔 피아노가 놓여 있다. 한쪽 모퉁이의 계단을 오르니 아늑한 다락방으로 연결된다. 바닥에는 얄따란 밤색 매트리스가 나란히 깔려 있다. 나지막이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가느다란 빛줄기가 들어온다.


”아, 따숩다.“


왠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곳이다.


알베르게 공용공간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따스했던 다락방


“올라(Hola)!"


누군가 나를 부른다. ‘Tom’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중년의 남성은 미국에서 온 순례자였다. 은퇴 후 순례길을 완주한 톰은 지금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이른 체크인을 해 주었다.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 먹고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낸다. 걸음을 일찍 멈추니 오후가 길어진다. 반차를 쓰고 반나절 농땡이를 치는 기분이다.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기분 좋은 무료함이다. 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 손에 들고 동네 마실에 나선다. 좁다란 골목 양쪽으로 베이지톤의 석조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그라뇬은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중세풍의 마을이다.


거리의 고양이와 (일방적인) 수다를 떨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사람들로 북적댄다. 내 매트리스 옆자리에 기럭지가 기다란 내 또래의 동양 여성이 짐을 풀고 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일본인이다.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는 일본인이었다.


순례길에서 보이는 동양인의 대부분은 한국인이다. 나머지는 어쩌다 마주치는 대만 사람들, 그리고 매우 드물게 일본인. 중국인은 딱 한 번 만났는데 그나마도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자를 받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반갑다. 개인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지내기 수월한 친구들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의 적당히 내향적이고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나랑 잘 맞았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디나 예외는 있다.





저녁 6시가 되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저녁은 뷔페식인가 보다. 요리도 함께 할 거라더니 자원봉사자들이 이미 음식을 다 준비해 놓았다. 도와줄 게 없는지 멀뚱멀뚱 눈치만 보다가 미사 시간이 되었다.

순례길에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미사를 보았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 데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미사에 참석하는 이유는 뭔지 모를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미사가 끝났다. 고대하던 밥시간이다.

'아, 배고파.'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은 너무 늦다. 식당의 주방은 보통 저녁 8시 30분에 오픈한다. 소화도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다 보니 매일밤 배가 더부룩하다.


테이블을 한데 붙이고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해 놓은 음식을 날랐다. 오랜만에 보는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상차림에 마음이 흡족하다. 육고기를 먹지 않는 관계로 비록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한정적이지만. 대신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듬뿍 올려진 샐러드는 내가 거의 독식했다.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는 스페인에서 처음 먹어보는데, 카르둔(Cardoon) 줄기와 쌍벽을 이루는 나의 순례길 최애 식용 식물이 되었다.


다 같이 뒷정리를 하고 예배당에 다시 모였다.

올 것이 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자기소개 시간.


촛불을 하나씩 손에 들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순례길을 찾게 된 저마다의 사연을 나눴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내가 무슨 말을 떠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건 그때의 감정뿐이다. 가슴 한편이 요상하게 뭉클하더니 저 속 깊숙이서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오는 듯했다. 반응과 통제 사이에서 눈물이 눈물샘을 갈팡질팡 오간다. 뭐 이리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지. 갱년기에 접어드려나 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을 함께했던 순례자들을 길에서 마주치면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날의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통해 어떤 정체 모를 유대가 생긴 듯하다. 그중 몇몇과는 순례가 끝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연락을 했더랬다.


이제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추억 속의 인물들이 되어가지만, 언제든 떠올리면 가슴 따뜻해지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하루하루가 안녕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스위스에서 온 순례자가 저녁 식사 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내 사랑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그라뇬의 골목 풍경


순례길에서 마주한 구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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