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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지만 괜찮아

비자발적 디지털 디톡스 데이

by 그린망고

배낭여행이란 걸 처음 떠난 건 1990년대 중반이었다. 스마트폰 따윈 없던 시절이라 모든 정보는 종이 책자에서 얻었다. 지도는 미리 출력하여 머릿속으로 대강의 지리를 익혀 둔다.


나는 스스로를 독립성이 강하고 주체적인 인간이라 믿고 살았는데, 스마트폰이란 요물이 등장한 이후론 지극히 의존적인 바보가 되었다.


노래방이 생기기 전후와 비슷한 양상이다. 어릴 적 외던 유행가 가사는 지금도 입에서 술술 나온다. 반면, 노래방이 확산된 이후로 나온 가요들은 온전히 외는 곡이 하나도 없다.


이젠 또 한술 더 떠 AI라는 어마무시한 신기술이 우리 뇌의 가동범위를 드라마틱하게 축소시키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변해 있는 세상이 무섭다. 극소수의 똑똑한 인간들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구글맵 의존증 환자가 됐다. 순례길에서도 그랬다. 스마트폰 배터리라도 다 될라치면 불안감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노란 화살표만 보고 따라가도 충분한 것을. 심지어 구글맵은 이따금씩 엉뚱한 길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유심의 유효기간이 지나 하루를 인터넷 없이 걸어야 할 일이 생기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기차로 그 구간을 점프하기도 했다.


말로만 듣던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를 지난다.


폰세바돈(Foncebadón)에서 만하린(Manjarín)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는 이 십자가는 아스토르가(Astorga)의 카미노 박물관에 소장된 철의 십자가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순례자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철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다. 돌은 마음의 짐을 상징한다. 세상 모든 짐을 이곳에 내려놓고 여정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는 켈트족의 돌탑 풍습과 기독교 문화가 결합되어 유래한 관습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순례자들은 소원을 적은 돌멩이를 십자가 아래 놓아두고 잠시 기도를 드린 후 떠난다. 무언가 빼곡히 적힌 돌들이 수북이 쌓여 언덕을 이뤘다.


나는 온갖 상념을 이곳에 내려놓았다.


철의 십자가는 고도 1504m에 위치해 있다. 말인즉슨 이날은 거의 산마루를 끼고 걷게 된다는 것이다. 탁 트인 시야에 구름을 옆에 두고 걸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아, 역시 나는 산이 좋다.'


20대 초반에 태국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일본 친구가 있다. 전공은 산(山)이요, 취미는 탐조(探鳥)라고 하던. 나보다 한 살이 어린 친구였는데, 한창 시끌벅적하게 놀기 좋아할 나이에 고고한 선비 같은 취미를 가진 그 친구가 참 신기했었다.


그땐 ‘이런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청춘이여.’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나도 산이 좋고 새가 좋아졌다. 죽을 날이 가까워질수록 귀소본능이 강해진다더니. 흙을 밟고 살고 싶다.


오늘은 별 다섯 개도 모자란 날이다. 수풀이 무성한 오솔길도 자갈투성이 내리막길도 그저 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 산길을 걷다 보니 발아래로 마을이 보인다. 다듬지 않은 막돌로 삐뚤빼뚤 쌓아 올린 전통 가옥이 정겹다. 아직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꽃화분 곁에 앉아 지나는 나를 새초롬히 바라본다.


‘아, 빈틈없이 사랑스러운 날이다.’





산 중턱쯤 내려왔을까.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ós)’라 적힌 표지가 보인다. 이 동네 집들은 지나온 마을보다 연식이 더 되어 보인다.


노르스름한 돌벽에 초콜릿빛 나무로 덧댄 발코니 안팎으로 제라늄 꽃화분이 가득하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이 기지개를 켜며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그림이다.


검색해 보니 리에고 데 암브로스의 주민수는 2023년 기준 51명이다. 이런 자그마한 마을에도 알베르게는 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알베르게 앞에 놓인 허름한 벤치에 앉아 체크인 시간을 기다린다.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한 순례자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 공립 알베르게

조금 지나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오, 뭔가 제대로 아날로그 한 분위기다.’

투박한 외벽과 달리 건물 내부의 구조물은 따뜻한 내추럴 우드톤의 목재를 사용했다. 높다란 천장 아래로 1층에는 프런트와 주방이 있다. 한옆의 계단을 오르면 순례자들을 위한 도미토리가 나온다. 프런트에서 2층 난간 너머로 도미토리가 올려다보이는 개방형 구조다.


프런트 옆의 통창으로 아담한 정원이 보인다. 알베르게 건물이 정원을 ㄱ자로 감싸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는 성모상이 서 있고, 그 뒤로 ㄱ자의 가로획에 해당하는 도미토리의 회랑이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인다. 회랑 한 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에는 푸릇한 나무가 비친다.


도미토리도 독특하다. 벙커 침대 사이사이 나무 칸막이를 두어 2인 1실과 같이 사용할 수 있다. 미닫이 문까지 있어 문을 닫으면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 된다. 재밌는 건 위쪽은 뚫려 있어 옆 방 사람과 각자의 침대에 누운 채로 소통이 가능하다.


하이라이트는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이파이는 물론이고 모바일 데이터도 연결이 되질 않는다. 기지국이 들어와 있지 않은 모양이다. 전기 코드는 공용 공간에만 있다. 머리맡에서 핸드폰조차 충전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긴 인터넷이 안 되니 배터리가 닳을 일도 없다. 손이 한가해졌다.


하필 또 오늘 이곳에 묵는 순례자들의 공용어는 독일어다. 스위스에서 온 여성 순례자 한 사람만이 영어를 구사하고, 나머지는 영어가 불가능한 독일인들이다. 스위스 순례자가 나를 배려하여 가끔씩 통역을 해주긴 했지만 대부분은 독일어로 대화가 오갔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별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점철해 온 인생이므로. 알아듣지 못하니 대답해 줄 의무가 사라져 오히려 편한 면도 있다. 여러 가지로 디톡스를 체험케 해 주는 하루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로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가 옹기종기 붙어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이다. 아름답다.


내가 상상했던 순례길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역시 작은 마을이 좋다.


‘아, 행복하다.’


공원 벤치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


날이 저물어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다. 불을 끄니 완벽한 암전이다. '삐그덕 삐그덕' 오래된 나무 마루 틀어지는 소리만 가끔씩 들려온다. 평화로운 밤이다.


의도치 않은 디지털 디톡스 환경에 다소 당황했지만 의외로 견딜만했다. 아니, 꽤 괜찮았다. 조금 답답하긴 했으나 머리는 맑아지는 경험이었다.


의지만 있다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품게 됐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로 가는 길의 풍경


귀여운 전통 가옥들


햇살 아래 태평하게 오수를 즐기고 있는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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