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좀비가 될 것인가?

by inome

살다 보면, 문득 삶이 멈춰 선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몸은 움직이고 시간은 흘러가는데, 그 안에서 의미는 희미해지고, 목적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밀려난다. 거울 앞에 서 피곤한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을 본다. 심장은 뛰고 숨은 이어지지만,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다. 살아 있는 기계처럼, 정해진 동작만 반복하는 몸. 인간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

끊임없이 쌓이는 업무와 끝없는 반복 속에서, 얼굴이 서서히 닳아 간다. 자유와 기쁨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기능과 역할뿐이다. 학교에서는 점수를 위해 달리고, 직장에서는 성과를 위해 시간을 바친다. 잠시 멈추어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순간, 목구멍에서는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는다. 손에 쥐어진 것은 성취와 실패라는 성적표뿐.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든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겉으로 보면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감정은 서서히 사라지고, 자신만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동일성 속에서, 개인의 감각은 흐려지고, 남는 것은 군중과 똑같이 움직이는 몸짓뿐이다. 이 모습은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다. 더 무서운 건, 주변 사람들까지 같은 틀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다는 점이다. 효율과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할수록, 스스로를 돌볼 시간은 줄어든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좀비라고 부른다.

좀비는 영화 속 괴물이 아니다. 일상의 수많은 얼굴 속에서,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지하철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화면만 바라보는 사람들, 대화중에도 메시지 알림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들, 유행과 트렌드에 맞춰 자신을 재단하는 습관들. 겉으로 보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그들은 걸어 다니지만 생각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를 느끼지 못한다. 길을 돌 때조차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며, 마음의 스위치는 꺼진 화면처럼 어둡다.

자유란 단순히 권리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힘이다. 하지만 무기력은 그 힘을 잠식한다. 작은 선택조차 외부 기준에 맞춰 내리다 보면, 삶의 기쁨과 책임감은 사라지고, 수동성이 자리 잡는다. 수동성은 전염된다. 한 사람의 무력감이 퍼지면, 사회 전체의 의지조차 점점 약해진다. 사회는 오직, 개인의 자율적 판단이 살아 있을 때만 숨 쉴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단순히 외부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이 아니다. 불안과 기쁨은 사건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이는 무너지고, 어떤 이는 한층 더 단단해진다. 바로 그 차이가 인간을 능동적 존재로 만든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우리는 무기력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다. 단순히 하루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직접 만들어가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늘 불완전하다. 우리는 흔들리고, 확신보다는 의문 속에 선다. 그래서 결국, 내가 내리는 선택조차 진정 내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불안은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지만, 그 길의 끝에는 자유가 아니라, 수동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다. 효율과 성과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는 조금씩 목소리를 잃는다.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마침내 스스로조차 들을 수 없게 된다.

이 상실은 결코 한 사람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질문을 잃은 개인들이 모이면, 사회 전체의 사고와 가치관은 단조로워지고, 다양성은 줄어든다. 창의성은 점점 고갈되고, 의문을 품지 않는 사회는 차갑게 굳어버린다. 공감과 신뢰마저 무너진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닮은 무표정한 군중으로 남는다.

타인을 무시하고, 외부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이면 사회는 점점 획일적이고 무감각한 집단으로 변한다. 질문을 잃은 사람들, 의심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성찰을 잊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며, 그 속에서 사회 전체는 조금씩 좀비화된 구조로 나아간다. 이제 현실은 명확하다. 개인의 상실이 모여 사회의 상실이 되고, 사회의 상실이 다시 개인의 상실을 강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닮은, 질문 없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반복 속에 갇힌다.

인간은 늘 두 갈래 길 사이에서 흔들린다. 안전하지만 무기력한 삶, 혹은 불안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자유를 향한 삶. 우리는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지 못한다.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면, 그 따스함 속에서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숨 막히는 답답함이 밀려온다. 누군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머릿속 깊숙이 묻어둔 의문들이 슬금슬금 꿈틀댄다.

안전과 자유는 늘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만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엇갈린다. 우리는 잠시 편안함에 몸을 맡기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 한 분이 조여 오며 삶의 속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때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불현듯 솟구치지만, 동시에 자유가 주는 책임과 불안 앞에 주저하게 된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우리는 흔들리며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만난다.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안전을 좇다가도 다시 자유를 탐하며, 우리는 자기 삶의 무게를 온전히 느낀다. 그것이 삶을 살아있게 하는 증거다. 손끝으로 느끼는 사소한 것들, 지나가는 사람의 눈빛, 낯선 길을 걸으며 맞는 바람의 차가움, 작은 선택 하나가 만드는 변화—이 모든 것이 우리 존재를 증명한다. 인간은 그렇게 불완전한 몸과 마음을 안고, 자유와 안전 사이를 오가며,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나만의 작은 행위를 쌓아간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끼고, 고민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며 살아가는 이유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외부 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인지,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결단할 것인지. 중요한 것은 지금 경험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이해하느냐이다.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 때 우리는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는 제도나 권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이해를 관찰하고 다스리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율할 때, 고통과 두려움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일관성을 확보한다.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붙잡고, 죽음의 그림자를 앞에 두고서도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다. 사회의 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 그 내적 자유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움의 조건이다.

사람들은 흔히 부와 명예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도, 승진과 칭찬과 돈을 손에 쥐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왜일까. 그건 단순하다. 그 행복이 진짜 나와 맞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이 만들어 준 기준, 사회가 정한 등수,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그 위에 올라서 있어도, 정작 내 안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남들이 아무 관심을 주지 않아도, 돈이 별로 없어도, 내가 정말로 원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속이 가득 차오른다. 손끝으로 무엇을 만들든, 발걸음을 내가 선택한 길 위에 두든,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뒤집혀도 상관없다. 내 선택이 내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경험, 그것이 진짜 자유다. 그 자유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남의 평가와 무관하게 나를 살아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

만족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하지만 나와 내 욕망이 일치하는 순간, 세상의 조건이 흔들려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 안에서 느끼는 충만함은 한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삶의 깊은 숨결처럼 지속된다. 그 숨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오늘날, 진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의 목적 속에서 움직인다. 성과와 규칙, 눈에 보이는 기준이 그 목적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무심히 자신의 욕망을 뒤로 미루며, 안온함과 편리함에 몸을 맡긴다. 그것은 사회가 나빠서도, 잔혹해서도 아니다. 사회란 그저 같은 부분과 다른 부분이 모여 만들어진 흐름일 뿐이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부분을 따라 나아갈 뿐이다.

부와 명예도 그렇다. 그것이 내 마음과 맞닿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공허뿐이다. 살아 있으면서도 마음이 멈춘 듯, 하루하루를 정해진 틀 속에서 흘려보내는 느낌.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마음 한켠에서 왜 이렇게 사는지 묻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순간. 바로 그 공허가 자유를 잃은 상태다.

진정한 자유는 외부 조건과 무관하게,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행동할 때 비로소 찾아온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 화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관찰하고, 순간의 충동에 휘둘리지 않는 힘. 피곤한 몸을 쉬게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내가 무엇을 정말 원하는가?”를 묻는 시간. 친구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고, 상대의 말을 진심으로 들으며 이해하려 애쓰는 순간. 이런 사소한 선택과 행동들이 쌓일 때, 마음은 조금씩 스스로 숨을 고른다.

좀비처럼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진짜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어떤 경우에도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 물음을 붙드는 한, 사회가 아무리 효율과 통일을 강요해도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 남는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같은 흐름을 따라가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의 욕망과 본성을 이해하고 선택하는 사람은 결코 같아지지 않는다.

그 선택 하나하나가 쌓일 때, 비로소 내적 자유가 자리 잡는다. 자유란 권리나 제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책임지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공동체에도 흔적을 남긴다.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사회도 달라진다.

살아 있는 인간은 바로 이런 자기 인식과 선택 속에서 태어난다.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아는 사람만이, 외부의 압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삶을 살아내며, 마음속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자유를 피워낸다.

인간다움과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실천과 반복 속에서 유지된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내면의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작은 저항과 결단을 이어갈 때, 우리는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를 넘어 스스로 의미를 만드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 성장이 이어질 때,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무기력에서 벗어나, 더욱 건강하고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keyword
이전 07화왜 우리는 거짓말에 끌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