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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부록4)

금지를 금지하려는 사람들

by inome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느끼기보다 계산하기를 좋아한다. 더 효율적인 선택, 더 합리적인 판단이 올바른 길이라 여기면서 이성은 감정을 밀어냈다. 과학은 삶의 불확실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기술은 그 신념을 실제의 속도로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삶을 안전하다고 믿었다. 선택은 주어지는 것이고,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았다. 계획은 삶의 기본 값이고, 계산은 곧 성공의 조건이었다.

규칙은 예외를 줄여 혼란을 막았다. 기준이 있어야 빠르고 명확한 판단이 가능했다. 체계와 효율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고,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불확실한 감정보다 그 약속을 더 믿었다. 질서는 확실히 편리했고, 틀은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기준이 하나의 정답처럼 굳어지면서, 질문이 사라졌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 않게 되었고, 따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말은 줄어 소음이 사라졌지만 생각은 멈췄다. 남은 것은 조용한 순응뿐이었다.

이성과 효율이 삶을 더 나아지게 해줄 거라는 확신은 점점 보이지 않는 피로를 쌓아갔다. 수치와 기준이 삶을 주도할수록 감정은 점차 뒤로 밀렸다. 느끼기보다 계산하고, 공감하기보다 판단하게 되면서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잊게 된 것이다. 속도는 남았지만, 깊이는 사라졌다. 누군가는 바깥을 향해 저항했고, 누군가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눌려 있던 감정은 결국, 제 자리를 찾기 위해 터져 나왔다.

감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가라앉기는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보여도, 이미 균열은 생겨 있다. 말하지 못한 분노는 언제든 다른 사람의 말에 과하게 반응하게 만들고, 누르던 슬픔은 몸의 통증이나 피로로 바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짜증, 갑작스러운 거리감은 대체로 억눌렀던 감정에서 시작된다. 단단한 질서와 기준이 감정을 밀어냈을 때, 더 은밀하고 불편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선택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어디선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소해야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

이성과 규범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감정을 계속 억누르기만 하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와 일상의 흐름을 깨뜨리기도 한다. 익숙하던 삶이 멈칫하는 그 순간,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 쌓여 있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 감정은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오래된 불안이 드러나기도 하고, 외면해왔던 분노나 감춰두었던 욕망이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때의 감정은 진짜 자아를 되찾은 듯 강하게 다가오지만, 실은 억눌림이 만든 과장된 반응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살아난 감각은 금기와 억제가 막아온 마음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어간다.

죽음, 성, 도박, 중독—이 단어들은 오랫동안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는 금기였다. 사회는 이를 감춰야 할 충동으로 취급했고, 사람들은 그 억제를 통해 안전함을 유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억제 자체가 감정과 감각을 왜곡시킨다. 하지만 금기를 넘는 순간, 억눌렸던 감정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다. 불안, 분노, 욕망처럼 오래 눌러둔 감정은 감각을 자극하며 이성보다 먼저 반응한다. 이때 사람은 마치 본래의 자아를 되찾은 듯한 강렬한 감각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 반응은 실제 자아라기보다 오랜 억압이 낳은 과장된 반동일 수 있다.

쾌락은 감정을 가장 빠르고 강하게 흔드는 감각이다. 겉으로는 단순한 기쁨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근원에는 생존과 연결된 본능적인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식욕과 성욕이다. 음식은 허기를 채우는 동시에 강한 만족감을 동반하고, 성적인 접촉은 육체적 쾌감과 함께 긴장과 불안을 잠시 잊게 해준다. 이런 감각은 익숙한 경험으로 남겨져 있다. 이 익숙한 감각이 다시 욕망을 불러오고, 욕망은 반복을 만든다.

억눌려 있던 욕망이 어떤 계기로 풀릴 때, 감정이 갑작스럽게 솟구치며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때 쾌락은 단순한 욕망의 분출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있던 억압이 만든 과잉된 반응으로 나타난다. 감각은 왜곡되고, 감정은 주변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게 만든다. 마치 해방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지배하던 억압이 또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휘두르는 순간이다.

쾌락이 금기와 가까워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스스로 선택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동으로 반응하는 습관이 된다. 처음에는 긴장을 풀거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쾌락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자극을 받으면 곧바로 반응하게 되고, 감정은 점점 정해진 자극과 반응의 틀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들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거나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도 약해진다. 원래는 자유로움을 주던 감정이 통제를 잃고, 마음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힘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의 쾌락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충동이나 집착처럼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쾌락에 대한 충동이나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정과 판단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이 있고, 충동과 절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도 계속된다. 어떤 선택은 순간적인 욕구에서 비롯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붙들고자 하는 움직임 또한 존재한다. 삶은 그런 갈등과 흔들림을 지나며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반복되는 유혹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고, 다시 써 내려가려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쾌락의 요구는 여전히 균형을 흔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쾌락을 향한 움직임은 해방을 갈망하는 욕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독립성과 자기 결정권, 그리고 자기다움을 지키려는 내면의 요구다. 어쩌면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규범에 의해 흐려진 자신을 다시 찾으려는 회복의 몸짓에 가깝다. 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다. 삶의 경험, 성격, 가치관, 그리고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해방에 이르는 경로는 각기 다른 흐름으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그 길이 충동이나 강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쾌락의 반복 속에서 자기 회복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이런 차이들은 쾌락이 단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억압과 갈망이 교차하는 자리다.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은 언제나 개인의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법과 도덕, 경제적 여건, 사회적 관계는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을 제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내면의 긴장을 풀어내려 한다. 이때 상상력과 표현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감정은 상징이나 은유로 전환되고, 억눌린 충동은 구체적인 행위 대신 다른 경로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표현은 단순한 배출이 아니다. 감정을 다루는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고 사회와 연결되는 방식을 제공한다.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생각이 표현을 통해 형태를 갖추고, 그렇게 만들어진 형식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창이 된다.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이자, 자기 인식을 위한 구조로 기능하는 셈이다.

때로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통념에 저항하며, 의도적으로 금기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그것을 표현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극단적이거나 파괴적인 내용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곧 위험하거나 일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표현은 현실의 행동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오히려 이와 같은 방식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내면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상상과 재현은 현실을 왜곡하기보다는 그 이면을 비추는 수단이다.

불편하거나 자극적인 표현일지라도, 그것이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자기감정의 솔직한 반영이거나 사회가 감추려는 면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면, 이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억압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불안을 이미지나 서사로 표현하곤 한다. 특히 금기를 활용한 표현은, 무엇이 왜 금기시되는지를 묻는 과정에서 사회의 규범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자극적인 표현은 때로 무의식과 사회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다. 불쾌하거나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장면을 일부러 과장하는 것도, 억압된 감정과 감춰진 권력 구조를 가시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장은 감정적 충격을 통해 기존 감각 질서를 뒤흔들고, 익숙한 가치 판단에 균열을 낸다. 그 결과 우리는 무심히 지나쳤던 금기와 규범을 다시 묻게 된다. 일탈을 다루는 표현 형식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며 그 바깥을 상상하게 만든다.

누구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통해 스스로의 주인이 된다는 당연한 권리를 솔직히 드러내고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살아온 환경, 성격, 믿음,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배경이 얽히며, 그 얽힘은 단순한 복잡함이 아니다. 삶을 밀고 나가려는 마음 앞에 서는, 실질적인 벽이다.

벽 앞에 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길을 택한다. 어떤 이는 돌아서고, 어떤 이는 뛰어넘으며, 또 다른 이는 균열 난 틈을 비집어 빠져나가려 한다. 가끔은 그 벽을 산산이 부수고 싶어지는 격렬한 충동도 몰려온다. 바깥과의 충돌뿐 아니라, 안에서 뒤엉킨 감정·욕망·불안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소용돌이치는 그 모든 움직임이 곧 갈등이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억눌러도 사라지지 않고, 외면해도 잊히지 않는다. 가슴이 먼저 뛰거나 언어로는 다 옮기지 못할 여운으로 남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충동이나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욕망으로 모습을 바꾼다. 사회는 이런 감정마저 정돈된 범주 속에 넣어 이해하려 하지만, 현실은 예고 없이 솟구치는 욕구들로 우리를 흔든다.

억압을 넘어서려면 감정을 무작정 억누르거나 폭발시키는 것만이 답이 아니다. ‘왜 그런 벽이 생겼을까?’를 묻고, 터져 나온 감정을 거울삼아 현실을 비춰볼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잃었던 균형을 되찾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힘도 생긴다. 감정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앞으로 밀어내는 동력이다. 솔직함을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삶은 다시 짜이기 시작한다. 감정을 정리해 표현하는 일은 새로운 언어를 익혀 세상과 대화하는 과정이다. 내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낯선 문장을 해독하듯 스스로를 다시 이해하게 된다. 처음엔 표현이 서툴고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가 드러난다.

우리는 누구나 욕망과 책임, 아름다움과 불편함, 자유와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며 질문을 반복한다. 그것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끝없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것은 그 질문을 멈추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다가가려는 마음속에서 중요한 어떤 용기가 생긴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태도다. 그것은 그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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