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품도 망할까?(부록5)

by inome

언젠가부터 명품을 손에 넣는 일이 더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절, 값비싼 가방이나 지갑을 구매할 때면 단순한 소유 이상의 감정이 일었다. 그것은 어떤 확인의 순간이었다. 나의 취향, 사회적 위치, 혹은 지금 이 삶이 이전보다 조금은 나아졌다는 실감 같은 것. 물건은 단지 물건이 아니었고, 손에 쥐는 행위는 조용한 선언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감정의 파동은 없다. 익숙함 탓인지, 아니면 반복된 체험이 감각을 무디게 만든 건지, 더는 갖고 싶다는 욕망조차 또렷하지 않다. 단순히 취향이 바뀐 걸까, 아니면 욕망을 떠받치던 세계 자체가 희미해진 걸까.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가 무너질 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구조가,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건을 향한 감정의 변화에 천천히 이름을 붙이다 보면, 더 근본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왜 어떤 사물에 특별함을 부여하는가. 무엇이 그것을 단순한 소비재에서 ‘명품’으로 전환시키는가. 가격일까, 희소성일까, 혹은 정교하게 축적된 기술과 시간일까.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겹겹이 쌓여 있지만, 그 모든 외피를 벗겨낸 자리에 끝내 남는 것은 하나의 전제다. “비싸기 때문에 가치 있다.” 문제는 그 믿음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과시의 언어로 이해하고, 또 누군가는 자아 표현의 방식으로 정당화하지만, 이 믿음의 구조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익숙하며,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단지 사물의 질이 아니라, 그 질을 인정하는 질서 자체에 대한 신념이다.

제품의 가치는 종종 그 물건 자체를 넘어, 그것을 둘러싼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예술이 귀족의 후원을 통해 사회적 위신을 획득했듯, 명품 또한 오랜 시간 동안 특정 계층의 기호와 취향 속에서 특별한 위상을 구축해왔다. 명품은 단순히 비싼 물건이 아니다. 정교한 제작 기술, 독창적인 디자인, 유서 깊은 전통이 결합된 상징적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질들은 기능이나 형태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 가치는 사회적 기억과 제도적 환경, 그리고 소비자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은 단순한 장인 기술이나 종교적 도구가 아니라, 작가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을 담은 고유한 표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작품에 작가의 서명이 들어가고, 그 독창성이 강조되면서 예술은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는 점차 그 아름다움이나 기술적 완성도만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누가 그것을 가졌는지, 얼마나 희귀한지 같은 사회적 기준이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예술은 점차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 사회적 위신과 우월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갔다. 높은 가치를 지닌 예술품은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지위와 삶의 방식까지 암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소비에서 나타난 배타성은 생산의 구조 안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예술을 창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제한된 자원과 교육, 그리고 특정한 사회적 배경을 전제로 한 활동이었다. 창작의 영역 자체가 하나의 계층으로 작동했던 셈이다. 왕실의 후원, 귀족의 사적 공간, 그리고 폐쇄적인 아카데미 중심의 교육 체계는 예술가를 제도적으로 구분했고, 그들을 둘러싼 언어와 규범 역시 특정 계층의 세계관에 의해 형성되었다. 예술은 점점 대중으로부터 멀어졌고, 감상은 감동이 아닌 이해력의 문제, 다시 말해 특정한 문화 자본을 가진 이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해석의 장으로 바뀌었다.

예술은 점차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멀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소외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구축된 장벽이었다. 높은 가격, 난해한 표현, 폐쇄적인 유통 구조는 예술을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감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경험이 아니라, 선택받은 이들의 교양과 위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 안에서 취향은 개인의 감각이 아니라, 지위를 표지하는 문화적 언어로 작동했다. 물론 제도 바깥에서 과감한 시도를 이어간 이들도 있었지만, 예술이 향한 흐름은 대체로 배타적이었다.

이러한 예술의 배타성은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명품문화다. 명품은 단지 잘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예술이 지닌 위계와 권위를 상품의 형태로 계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왕실과 귀족의 언어를 새롭게 대체한 기호처럼 기능한다. 명품문화는 예술의 계층화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생산과 소비 양측에서 철저히 제한된 세계 안에서 장인정신, 희소성, 브랜드 유산이 가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소수만 접근 가능한 세계’라는 설정이 지탱한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물건이라기보다, 잘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세계의 일부다. 따라서 그것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해 있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실제로 명품 브랜드는 귀족이나 왕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단순한 후원 관계를 넘어,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소비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렇게 형성된 소비문화는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흐름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 대량 생산과 기술 발전은 부의 구조를 바꾸었고, 그 안에서 부를 축적한 중산층은 이제 사회의 새로운 소비 주체로 자리 잡았다. 생존을 넘어 취향과 여가를 고민하게 된 이들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표현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상류층의 소비 방식을 모방하고 싶어졌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계기로 새롭게 부상한 중산층들은 여가와 소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았다. 철도와 선박의 발달은 장거리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여행은 단순한 이동을 넘어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하나의 문화적 실천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중산층에게 명품소유는 고급스러움과 사회적 지위를 표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 욕망을 정확히 겨냥한 브랜드들은 빠르게 시장을 넓혀갔다. 극소수의 전유물이던 예술소비는, 이제 명품 산업이라는 더 넓은 시장으로 옮겨가며 새로운 형태로 확장되었다.

프랑스의 장인 루이 비통은 이 흐름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는 고급 여행용 트렁크를 제작하며 명성을 얻었고, 견고한 구조와 방수 기능을 갖춘 평평한 형태의 트렁크로 실용성과 미적 완성도를 동시에 충족시켰다. 여행이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 시대, 그의 트렁크는 단순한 수납도구를 넘어 세련된 감각과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주목받았다. 이는 중산층의 새로운 욕망과 맞물렸고, 루이 비통이 만든 가방은 품질을 넘어 상징성이 소비되는 시대의 전환점을 보여주었다. 단지 잘 만든 물건이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계층의 욕망이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명품산업은 단지 전통적 상류층의 지위를 재현하려는 중산층의 모방 욕망에 머물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화적 전환기에 새로운 미적 언어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명품은 전통의 계승이라는 관성을 넘어서, 아직 도달하지 않은 삶의 감각을 상상하게 만드는 움직임과 맞닿아 있었다.

20세기 초, 가브리엘 샤넬은 여성의 자유와 사회적 지위 변화에 주목했다. 그녀가 제안한 패션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기존의 성 역할 규범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복잡하고 과시적인 장식 대신 실용적이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여성의 일상과 움직임을 새롭게 정의하려 했다. 이는 단지 스타일의 전환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이었다. 샤넬의 활동은 브랜드가 사회 변화와 연결될 수 있고, 패션이 단순한 옷이 아니라 문화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사회적 메시지는 브랜드가 명품의 반열에 오르는 데 있어 점점 더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샤넬이 보여준 것처럼, 패션은 더 이상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이자 문화적 선언이었다. 이 흐름은 다른 브랜드들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구찌는 제품의 완성도와 장인정신을 이탈리아의 지역 전통과 예술, 공예와 결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그들이 구현한 ‘이탈리아식 삶의 방식’은 지역성과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시각화한 사회적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프라다 역시 전통과 현대를 잇는 실험적인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에게 물건 이상의 감각과 태도를 제안해왔다. 이처럼 브랜드들은 각자의 언어로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며 고유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구성해왔다.

브랜드들은 자신들이 추구해온 가치는 단순한 고급 소비재의 범주를 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 기억, 정체성이라는 비물질적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전달했다. 제품의 기능이나 가격을 보다 그 속에 담겨있는 지위, 성공, 미적취향, 역사와 전통, 소속감과 유대감 같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사회적 인식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명품이 탄생했다. 이들은 어느 순간 문화적 상징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명품구매는 사회적 위치와 연결 짓는 매개로 자리 잡았다. 소비자들도 단순한 사치나 과시가 아닌,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명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제품 그 자체보다 브랜드가 전달하는 이미지와 메시지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특히 새롭게 부상한 중산층과 젊은 세대들은 명품을 통해 기존 질서의 중심부로 편입되었음을 확인받고자 했고, 브랜드는 그 욕망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정체성과 소속감, 고급화된 취향을 한데 묶어 하나의 세계관으로 제시함으로써, 명품이 곧 자기서사의 일부가 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명품이 문화적 전환과 미적 혁신을 이끌어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산업은 여전히 계층화된 소비 구조에 기대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엉뚱한 장소에서 발생했다. 대량생산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명품이 의존해온 상징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패션, 액세서리, 뷰티 산업 전반에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품이 급증했고, 브랜드가 강조해온 ‘희소성’은 점점 그 설득력을 잃었다. 정교한 기술과 고급스러운 재료는 더 이상 장인의 손을 거치지 않아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명품은 대중의 기호를 만족시킬 만큼 범용적인 산업으로 확장됐다.

확실히 변화의 시그널은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브랜드들은 정체성의 표현이라는 욕구를 상업적으로 포장해내는 전략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실제 명품 브랜드들은 여전히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소비자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려 한다. 이들은 제품을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개인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그 경험이 미래적인 서사의 시작임을 제시한다. 마치 소비자가 어느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인 것처럼 특별함과 진정성을 느끼도록 메시지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모순이 숨어 있다. 감정과 진정성을 앞세우면서도, 브랜드는 대량 생산과 표준화된 이미지 전략으로 개별적 표현의 여지를 좁힌다. 실제로 소비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찾는 대신, 정해진 브랜드의 틀 안에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다수의 일부가 된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명품인증' 문화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반증한다. 브랜드의 이미지가 사람보다 앞서고, 제품의 의미가 내면의 태도보다 외면의 과시에 종속된다. 개인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개인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표현의 자유와 감정의 다양성은 브랜드의 전략에 흡수되고, 개성은 정해진 틀 안에서 반복된다. 이제 명품은 누구의 정체성도 진정으로 대변하지 못한 채, 소비 욕망의 표식으로 남는다.

명품이 장인의 철학과 정교한 손길,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예술적 퍼포먼스로 여겨지던 시대는 이미 멀어졌다. 수작업과 섬세한 디테일에 깃든 깊은 사유는 점차 흐려졌고, 이제는 오래된 박물관에 남겨진 설명문처럼 과거의 이야기로만 회자된다. 많은 브랜드는 예술적 표현보다 생산 효율성과 유통 구조를 앞세우며, 제품 간 차별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 사이 일반 제품과의 품질 격차마저 좁혀지면서, 명품이 지녔던 고유한 감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고급 제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한때 예술성과 내면의 깊이를 담았던 명품의 세계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제 명품은 고유한 오브제가 아니라 브랜드 로고를 통해 소비되는 기호로 자리 잡았다. 제품 자체를 이해하거나 감응하려는 태도는 뒷전이 되었고, 대신 ‘소유한 나’라는 이미지가 전면에 등장한다. 감정의 표현처럼 보이는 소비는 실상 과시와 동일시되고, 개성이라는 이름 아래 제시된 것은 브랜드가 설정한 정형적 감정의 틀일뿐이다. 예전에는 하나의 제품에 작가적 시선과 세계관이 담겼지만,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현재형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오늘날 명품의 의미는 제품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경험조차 진정한 감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신화처럼 구성된 믿음을 따라가는 연출에 가깝다. 개성의 표현을 가장한 이 연출은 오히려 개인의 감정과 취향을 주변부로 밀어낸다. 그렇게 명품은 더 이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정해진 욕망의 프레임 안에서 소비되는 장면이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명품을 대하는 태도는 더 이상 물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보여지는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연출된 이미지가 되었고, 점점 더 정교하고 전략적으로 구성된다. 소비자는 브랜드가 설계한 정서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취향을 브랜드의 선택기준에 위임한 채, 감정의 주체가 아니라 수신자로 머무른다. 문제는 이 과정이 지나치게 매끄럽다는 점이다. 의심할 틈도 없이, 고유한 경험조차 ‘이렇게 느껴야 한다’는 지침 아래에서 자동적으로 수행된다. 진짜 감정은 점점 침묵하고, 감정을 연기하는 법만 남는다.

개성의 이름으로 제시된 정형화된 스타일은 사실, 브랜드가 부여한 일관된 문법을 따르고 있다. 그 문법은 취향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코드에 가깝다. 우리는 점점 어떤 물음도 없이, 더 빠르게 선택하고, 더 자주 노출된다. 선택은 많아졌지만, 질문은 줄어들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처럼 보이게 만드는가가 중요해진 시대. 감정은 그 자체로 표현되기보다, 브랜드의 미장센에 맞게 조율된 감정으로 소비된다. 그리고 이 침묵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현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명품은 더 이상 장인의 손끝에서 빚어진 고유한 물건이 아니다. 지금의 명품은 욕망의 언어로 기획된 시각적 장치이며, ‘가치’가 아닌 ‘인식’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이 명품처럼 보이는가에 반응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명품은 특별한 대상이 아닌, 누구나 동일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포장된 평범한 기호로 전락한다. 감각의 밀도는 사라지고, 이미지의 반복만 남는다.

이 흐름은 단지 고급 취향이나 예술적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는 물건을 오래 보고, 직접 만지고, 사용하면서 각자의 해석이 깃들었고, 그 해석이 물건을 바라보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빠르게 등장하고 소비되며, 곧 다음 이미지로 대체된다. 명품이라는 이름 아래 남는 것은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브랜드가 설계한 감정의 틀과 이를 반복하는 소비자의 습관뿐이다. 감정은 표현이 아니라 연출로 바뀌고, 취향은 탐색이 아닌 선택지로 배달된다.

오랫동안 ‘절대적 우위’의 상징이었던 명품의 권위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마크나 로고 소비의 범람, 인증 문화의 확산, 플랫폼을 통한 이미지의 복제는 ‘명품=지위’라는 공식을 흔들었다. 누구나 비슷한 이미지를 흉내 내고 퍼뜨릴 수 있게 되면서, 명품은 고유한 위상이 아니라 가벼운 시각적 효과로 소비된다. 결국 남는 것은 가격이 아니라, 끝없이 순환되는 이미지의 표면이다. 이제 ‘비싸다’는 사실조차 위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명품이란 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던 무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 변화는 개인의 소비 행태를 넘어 사회의 구조적 전환을 암시한다. 그것은 전통의 붕괴다. 질서의 전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수십, 수백 년에 걸친 장인 정신과 미적 규범을 자산으로 삼아왔던 고유한 문화가 서서히 무너지고 빠른 유행과 협업 중심 기획으로 전통적 문법을 파편화되고 있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 장인들이 축적한 방식—시간을 들여 손으로 완성하고, 역사적 문맥을 토대 삼아 한 시즌 한 시즌을 쌓아 올리던—이제는 팔로워 수와 바이럴 속도에 밀려 뒷전이 된다. 누적된 전통은 더 이상 시장에서 절대적 지위를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움을 방해하는 낡은 기호로 치부되기 쉽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다.

왜 정체성의 변화인가? 명품과 같은 상징들 사회가 축적해놓은 절대적 권력이 더는 ‘확정된’ 지위와 가치의 표식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 가능한 옵션’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어떤 가방을 들었는가가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떤 나로 존재할 것인가를 그때그때 선택한다는 것이다. SNS 필터를 바꾸듯, 디지털 아바타의 스킨을 갈아입듯, 정체성은 끊임없이 편집되고 업데이트되는 변화의 요소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다는 느낌이다. 실제로는 알고리즘과 트렌드가 제시한 메뉴판에서 고르는 것뿐일지라도, 개인은 주체적 선택이라는 서사를 갖는다. 그래서 모든 질서는 선택지 중 하나로 축소되며, 더 이상 고정된 위계나 전통적 권위를 담보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명품의 쇠퇴는 소비문화 내부의 단순한 가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 체계의 해체, 전통 서사의 약화, 그리고 정체성 자체가 유동화 되는 거대한 전환의 징후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어떻게 끊임없이 자신을 재구성하느냐로 평가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명품이 지닌 상징적 힘이 약화된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끝없이 갱신되는 선택의 프로세스—그리고 그 선택을 연출·과시하는 플랫폼의 힘이다.

오늘날 명품의 빈자리는 “영원히 고정된 가치”가 아닌 “영원히 갱신되는 나”가 채운다. 권위와 전통이 무너진 공간에서, 정체성은 더 이상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편집’되는 항목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명품 붕괴가 알려주는 근본적인 메시지다. 우리는 가격표가 아닌 알고리즘의 파도 위에서, 고정된 서열이 아닌 가변적 페르소나의 유희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시 만드는 시대에 들어섰다.

keyword
이전 27화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부록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