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밤에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입안이 마른 것도 아닌데, 말이 돌처럼 무겁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무게는 분명하다. 속은 움직이는데 겉은 잠잠하고, 마음은 벌써 어디론가 흘러가 있다. 문장을 꺼내기도 전에 그 무엇은 지나가버리고, 돌아보면 잡을 수도 없다.
우리는 자주 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감정이 일어난 뒤에야 문장이 비로소 떠오르지만, 그때는 이미 그 감정이 어딘가로 스쳐 지나가 버린 후다. 언어가 닿으려는 순간, 감정은 이렇게 멀어진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가리키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 대신 침묵하게 되거나, 말 바깥의 다른 수단들을 찾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깨닫는다. 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언어 전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언어는 단지 입을 통해 나오는 문장만이 아니라 사유하는 방식이자, 마음을 통과해 나가는 감정의 경로이기도 하다.
우리는 몇 개의 언어로 살아간다. 살면서 마주하는 어떤 감정은 숫자와 논리의 형태로 정리되고, 일상의 문장으로 흘러나오며, 또 도무지 말로 붙잡히지 않아 예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주 정리되지 않는 혼란으로 머문다. 그만큼 마음은 복잡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하나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수학처럼 명확하게 정리되어 말이 되는 감정이 있다. 정밀하고 간결한 수학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고, 모호함을 피한다. 숫자와 논리는 어떤 대상을 고정하고, 그 위치를 정확히 지시가 가능한. 그래서 너무 복잡할 때, 수학은 그 복잡함을 단순한 구조로 바꿔준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에 잠시 숨을 돌릴 공간을 준다. 하지만 이 언어는 명확할수록 인간 내면의 미묘한 감정들을 담기 어려워한다. 상실의 흔적, 억눌린 분노, 이유 없는 울컥 같은 것들은 이 언어의 범주를 넘어선다.
감정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감정이 머무르고 울리는 공간을 만드는 언어도 있다. 예술이다. 좌표를 표시하지 않고 의미를 고정하지 않으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림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음악은 기억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 체험으로 다가온다. 체험은 해석을 포함하고, 그 해석은 마음을 연 사람에게서 비로소 살아난다. 그래서 예술은 정답보다는 가능성에 가깝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대게 이 둘 사이에서 문장이라는 형식이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그때그때 의미가 달라진다. 어떤 날은 위로가 되고, 어떤 날은 상처가 된다.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말은 다르게 들린다.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늘 불안정하다. 명확하게 다가가는 듯하면서도, 자주 빗나간다. 하나의 감정을 두고 충돌하기도 하고, 서로를 보완하기도 한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을 때, 수학의 언어로 상황을 정리하려 하고, 수학으로는 다다를 수 없을 때, 예술이 그 공백을 감각으로 채운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완벽할리는 없다. 수학은 감정을 담지 못하고, 예술은 늘 현실을 빗나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말은 쉽게 흔들린다.
그럼에도 이들은 함께 움직인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처럼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우리는 사랑을 분석하고, 말하고, 표현한다. 같은 감정이 수학적 구조로도, 일상의 말로도, 예술의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멜로디와 리듬은 수학적으로 구성되고, 박자와 구조는 계산의 산물이다. 가사는 감정을 번역하고, 청자는 그 말들을 따라 정서에 닿는다. 그러나 진짜 마음을 움직이는 건, 계산도 문장도 아닌, 그 안에서 설명되지 않고 남겨진 여백이다. 멜로디는 귀에 먼저 닿지만, 오래 남는 건 마음속에 맺히는 감정의 이미지다. 음악은 분석할 수 있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총합이다.
감정은 논리로 환원되지 않고, 사실은 체험을 대신하지 않으며, 해석 없는 표현은 울림을 잃는다. 그렇기에 언어의 방식과 한계를 아는 일은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이해의 방식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일. 진짜 소통은 언어를 넘어서기 위해, 먼저 언어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것은 완전한 언어가 아니라, 불완전한 언어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다층적 감각이다.
가끔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정말 잘 알 것 같다가도, 다음 날엔 도무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 마치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자전거 위에 올라타 있는 느낌이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일단 페달을 밟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사람은 혼자선 절대 자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거울 같은 타인의 말과 표정, 그리고 침묵을 통해서 겨우 조금씩 자신을 더듬을 뿐이다. 그리고 그 거울이 늘 조금씩 굴절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미 눈치 채고 있다. 비추는 것 같으면서도 비틀고, 보여주면서도 어딘가 감춘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시선 안에서 스스로를 찾기도 하고, 또 잃어버리기도 한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느 날엔 전혀 괜찮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반대로 하찮게 여겼던 어떤 모습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건 묘하고도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감정은 도저히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소속감, 불안감, 존재감 같은 것들. 언어로 꺼내려 하면 손에서 미끄러지는 물고기처럼 빠져나간다. 일상어의 그물은 너무 엉성하고 투박하다. 그런 감정들은 말 대신 음악으로 흐르고, 때로는 색채와 선이 되어 캔버스에 펼쳐진다. 혹은 숫자와 기호로 구성된 정리와 공준이 된다. 수학이나 예술이 꼭 필요하다 싶은 순간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설명할 수 없음 자체가 ‘나’라는 걸 더 정확히 말해주는 건 아닐까.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그 이상한 기류들 속에서 우리는 나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예전에 친구에게 꽤 진지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 안에서 오랫동안 맴돌던 어떤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로 꺼낸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 순간만큼은 꽤 잘 전달됐다고 느꼈다. 그런데 친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무언가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보낸 말들이 그의 마음에서 다른 색깔로 물들어버린 것처럼. 그때 감정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그건 내 것만은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은 공기를 통과하는 동안 어딘가 굴절되고, 누군가의 해석을 통과하면서 전혀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 누군가의 이해는 또 다른 이의 오해가 되고, 내가 다정함이라 생각한 말이 누군가에겐 간섭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언어는 결국 관계 속에 있다. 사전 속 정의보다는 그걸 어떻게 주고받느냐가 더 중요하다. 언어는 표현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점점 더 신중해진다. 말을 아낀다기보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 말이 가진 힘과 불안정함을 동시에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감정은 어쩌면 끝내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게 아닐까. 그저 조용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 속에, 말없이 나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말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런 시간 속에서 언어는 드디어 잠시 쉬어간다. 마치 어느 여름날의 그늘처럼.
세상은 조금씩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균형이란 그 기울기 위에서 사람들이 애쓰며 버티는 상태다. 전혀 중립적이지 않은. 누군가의 위치, 시선, 때로는 권력에 기대어 있는. 균형이라는 말은 같아도 다른 의미가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을 어떤 고정된 틀로 설명할 수가 없는 이유다. 내가 느끼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다른 것처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조금 다르고, 누군가와 있을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도 또 다르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감정에 따라—말하자면 그때그때의 바람결에 따라—자신을 다시 구성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고정되지 않아서 불편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 감정적인 일이다. 단순히 어떤 사실이 바뀌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은 늘 묻는다. “이 변화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 감정이 변화의 해석을 이끈다. 누군가에겐 기회가, 누군가에겐 상실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과 해석의 교차점 위에서 세계를 읽는다. 그리고 그 읽기의 방식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 언어는 그 복잡한 교차점을 통과하며 의미를 얻는다. 가볍고 투명해 보이는 말도, 안쪽을 들여다보면 감정과 판단이 고여 있다. 그러니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해석은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또 말을 한다. 아마 인간이란 그런 모순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사회는 문화, 종교, 정치, 인종 같은 다양한 층위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순한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과 희생이 얽힌 긴장의 결과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공존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했던 언어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수학. 예술, 일상어로 불리는 수단들. 그것들이 만드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언제나 균형과 불균형 사이 어딘가에서 어정쩡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어떤 충돌이 있고, 그 뒤에 겨우 만들어낸 타협이란 것도 실은 고요한 표면 아래 끊임없이 진동하는 에너지의 억제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잠정적인 정렬이라는 말이 어쩐지 어울린다. 표면은 매끄럽고 조용해 보이지만, 그 안은 언제든 흔들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균형은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한다.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어떤 순간은 그저 누군가의 수고에 의해 임시로 떠받쳐진 구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조금씩 조정하고 다듬는다. 대화하거나, 침묵하거나, 때로는 그냥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소소한 척한다.
문제는 그 균형이 언제 깨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데 있다. 분석이든, 예측이든, 그것들을 표현하는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 낡아버리고, 문득, ‘이제 이 말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꽤 쓸쓸한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보다도 그 변화에서 발생하는 어떤 에너지다. 그것을 감지하고, 해석하고, 가능한 방식으로 분배하고, 결국은 살아가는 방향과 엮어야 한다. 언어는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감정을 정리하고, 의미를 덧붙이며, 어딘가로 움직일 준비를 시킨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늘도 어떤 문장을 조심스레 말하고, 어떤 이야기를 마음속에서 천천히 완성해간다. 삶이란 그런 식으로, 잠정적인 균형과 조정의 반복 속에서, 어쩌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떤 감정은 끝내 언어가 되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감정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도록 막혀 있는 경우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게 만들어진 것들. 낮은 울림은 잡음이 되고, 떨리는 말은 감정 과잉으로 몰리고, 입모양이 완성되기 전의 소리는 무시된다. 그렇게 어떤 감정은 문장 밖으로 밀려나고, 어떤 몸은 언어 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방치된다. 이 억압의 구조는 감정에만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적 변화도 이와 비슷한 방식을 따른다. 어떤 변화는 '혁신'으로 이름 붙여지고, 어떤 변화는 아무런 이름도 얻지 못한 채 희생과 누락으로 처리된다. 변화는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버리는가.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기억되는 것과 지워지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는 진보가 아니라 분할을 마주하게 된다.
변화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할 때, 그 선택은 자연스레 다른 가능성들을 닫아버린다. 하나의 이익이 만들어질 때, 어딘가는 반드시 손실이 발생한다. 그 손실은 단순한 피해라기보다, 어쩌면 공동체라는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필연적인 무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는 늘 묵직한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가 치른 희생이 과연 옳았는가. 그 질문은 때로는 마음 한켠을 짓누르고, 결국 우리 감정과 언어, 그리고 삶의 방향까지도 움직이게 만든다. 어떤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는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매일 내리는 구체적인 선택과 맞닿아 있다.
선택에는 비용이 따른다. 그 비용이 곧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속에 자리 잡는다. 환경을 지키려 할 때, 편리함을 일부 포기하는 일이나, 세금으로 공공의 몫을 나누는 일 같은 것들이다. 그 손실은 단순한 뺏김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삶을 위한 책임감의 표상이다. 진정한 변화는 이런 책임의 선택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조금씩 길을 내는 과정이다. 한 사람의 결심이 아니라, 함께 걷는 발걸음들이 만드는 움직임이다.
속도와 효율성은 분명 쓸모가 있다. 때로는 그것들이 유일한 기준인 양 여겨지기도 한다. 빠르게 움직이고, 낭비 없이 처리하는 일은 많은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이 변화의 깊은 본질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지게 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떤 변화가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 가치가 누구에게 어떻게 돌아가는가이다. 그건 단지 이익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 생기는 관계가 있고, 조용히 사라지는 관계가 있다. 변화는 격렬할 때도 있고, 눈에 띄지 않을 때도 있다.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집단은 반드시 생긴다. 그런데 그런 영향을 무시하고 내린 결정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어떤 이는 익숙한 질서를 붙잡으며 새로운 움직임을 조심스레 바라본다. 또 어떤 이는 서서히 조율하며 균형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전혀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오래된 틀을 허물어야 할 순간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중간 어디쯤에서 현실적인 조정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이처럼 움직임에 대한 감각과 속도는 사회적 자리와 맞닿아 있다. 결국 각자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셈이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바꾼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규범과 제도들이 어느새 다른 얼굴을 하게 된다. 여성의 옷차림 규칙, 가부장 중심의 가족, 집단의 예절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들은 젠더에 대한 감수성이 조금씩 달라지고, 공적·사적 공간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자리 잡으면서 서서히 조정된다. 이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이어진다. 사회가 바라보는 지형과 감정의 풍경이 조금씩 다시 그려지는 것이다.
기술과 제도가 만들어내는 발전은 생산성과 편의를 높이지만, 동시에 노동의 가치, 자연과 인간관계의 방식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19세기 산업혁명이 그랬듯, 오늘날의 기술 혁신도 단순한 진보로만 바라볼 수 없다. 반드시 던져야 할 윤리적 질문이 존재한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 이 변화가 만드는 세계는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런 질문 없이 ‘발전’이라는 단어는 공허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변화는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어떤 세계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은 기술적 효율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과 윤리적 균형, 그리고 우리 내면의 감정과 경험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보’라는 이름을 얻는다.
모든 성찰의 시작점은 언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 지키고 싶은 것과 변화하고 싶은 것을 말할 때, 언어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 의미도 흐려지고, 질문도 희미해진다. 그래서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틀이다. 우리는 계속 말을 해야 한다. 그 말이 언제나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불완전하고 어쩌면 흐릿할지라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 말들이 쏟아져 나와 뒤엉키고, 부딪히고, 때로는 부서지더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길은 말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파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으니까.
나로 산다는 것은, 무언가 정해진 본질을 견고히 지켜내는 일이 아니라, 매순간 ‘나’라는 형상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고정된 자아의 유지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살아내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어제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타인의 말 속에서 오늘의 내가 겨우 실루를 드러내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런 차이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긋남은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자주 ‘정체성’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칫하게 된다. 마치 나라는 존재는 어디엔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을 것처럼, 어떤 본질을 지켜내야만 할 것처럼 강박을 느낀다. 하지만 삶은 그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다. 오히려 질문해야 한다. 지금의 나, 이 선택 속에서 내가 내린 판단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감각이야말로 나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다. 단단함보다 민감함이, 일관성보다도 응답성이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나로 산다는 것은 그래서 유연함이다. 단단히 고정된 자아로서가 아니라, 흔들리며 느끼고, 감응하며 다시 나를 빚어내는 어떤 존재로서.
그건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주 사회적 존재와 개인적 존재를 구분하지만, 실은 그 둘은 같은 감각에서 출발한다. 한 사람이 사회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관계 속에서 자기감정을 조율하는 방식은, 그가 혼자일 때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감지하고 이해하는지와 다르지 않다. 관계는 정체성을 증폭시키기도 하고 분열시키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로 산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같다. 사회 안에서든, 혼자일 때든, 기준은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기준만이 허락된다. 살아 있는 감각으로 자신을 계속 조율해나가는 것.
삶에는 실패가 있다. 오해도 있고, 왜곡도 있다. 애초에 완전한 이해나 정확한 해석이란 불가능하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느끼고, 다시 살아내려는 태도. 그러니까 중요한 건 완성된 정체성이 아니라, 변화하는 정체성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다. 그건 늘 불완전하고, 서툴고, 어딘가 부서져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를 느끼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나답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애초에 헛되고 답이 없는 이야기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의 나는 어떤 변화 속에 놓여 있는가?”일 것이다.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고, 살아 있는 흐름 속에 놓아두는 것 그렇게 나는, 당신은, 우리는 각자의 흔들림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고, 또 멀어지기도 하며, 여전히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변화의 민감함을 잃지 않는 데 있다. 단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감응하고 다시 말하려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는 어떤 고집 말이다.
어디에 도달하는 게 아니다. 그냥 조금씩, 계속 나 자신이 되어가는 일이다. 그 과정은 대개 조용하고, 종종 이상하게 느슨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닌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비슷하다. 완전히 닿지도 않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는. 말이 오갈 때도 있고, 말이 없어야 겨우 닿는 순간도 있다. 변하지 않는 완성을 사랑하는 건 어렵다. 어쩌면, 변하고 있는 나를 좋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살아 있는 느낌에 가까워진다. 어제의 그림자는 자꾸 발목을 잡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어깨를 살짝 밀어주는 일도 있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언제나 그 방향으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