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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하면서 살아볼까?(부록6)

by inome

사랑이란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말해보고,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겪었다. 하지만 막상 그게 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냥 좋은 감정이라기엔 마음을 뒤흔드는 면이 많고, 그렇다고 아프기만 한 감정이라 말하기엔 그 안에 분명한 기쁨도 있다. 노래 가사처럼 가볍게 흘러가다가도, 어느 날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마음을 깊이 찌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사랑을 말하려 하면, 어느새 말끝이 흐려지고 만다. 분명히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정인데도, 단정적인 문장 하나로 담기에는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 ‘행복’이나 ‘자유’ 같은 말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 그중에서도 사랑은 유난히 얼굴이 많고, 언제나 곁을 맴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는 아닌지, 왜 어떤 감정은 설렘이 되고 어떤 감정은 고통으로 바뀌는지. 단순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상으로, 그 감정이 왜 생기고, 왜 그렇게 마음을 흔드는지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통해 타인의 시선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려는 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정인 동시에 하나의 질문이 된다. 나는 왜 이 사람에게 끌리는가, 나는 어떤 관계를 원하는가,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누군가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신뢰를 가능하게 하고, 신뢰는 기대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그 기대 위에서 희망을 꿈꾸고, 그 희망은 결국 누군가의 헌신으로 움직인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과 감정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꺼운 포기가 없었다면, 그것은 그저 스쳐가는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 확신하던 생각을 흔들고, 익숙했던 생활 방식을 바꾸게 만든다. 욕망을 조절하고 태도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평소엔 지나치던 말 한마디에도 멈춰 서게 만들고,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 낯선 변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스스로를 태우듯 앞으로 나아가는 힘. 그것이 사랑이다.

고대 신화 속 에로스는 눈을 가린 채 화살을 쏜다. 이는 사랑이 이성을 흐리고 판단을 왜곡한다는 상징이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 역시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그의 화살에 맞은 사람은 이유 없는 끌림에 사로잡히고, 그 감정은 개인의 가치 판단이나 현실 감각을 가볍게 넘어서버린다. 이 신화적 상상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인간 감정의 구조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포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선택, 과장된 감정 표현은 당사자에게 명확하고 자연스럽다. 그렇게 한 개인이 오랜 시간 쌓아온 사고방식을 뒤흔들고, 자신의 내면을 특정한 존재에 맞춰 조정하게 만드는 힘. 사랑은 그렇게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그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이거나 건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랑은 표현되지 않은 채 마음 깊숙이 가라앉고,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내면의 결핍을 다루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정은 외부의 대상을 향해 있는 듯하지만, 실상 그 무게는 안쪽으로 기운다. 애착이 과도해지고 기대가 비대해지면서, 감정역시 왜곡된다. 집착이 되고, 때로는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멀어진 듯한 그 감정들도 어딘가로 굽어 흘러가는 회절 같은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때 사랑의 대상은 실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투사해 넣은 배경처럼 작동한다. 사실이 아닌 것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고통을 수반한다. 타인을 향해 있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 안의 결핍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족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애원은 기어이 자신의 갈망을 진심이라 믿고 더 깊이 빠져든다. 겉으로는 충만해 보이지만 내면은 고갈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무언의 요청이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결핍과 마주하려는 자기 해명의 방식이다. 상대 없이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열망. 감정을 전하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비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이 된다.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말로 다 설명하려는 순간보다, 말하지 못하고 남겨진 틈에서 더 선명해진다. 왜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왜 그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왜 나였는지. 사랑은 타인을 통해 돌아오는 길이며, 가장 멀리 돌아 가장 가까운 곳에 닿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을 때까지 너만 사랑할게”, “넌 내 전부야”,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 이런 말들은 감정을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그 감정을 덮으려는 방식에 더 가깝다. 떠날까 봐, 변할까 봐, 혼자 남을까 봐—그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익숙한 문장을 꺼낸다. 그럴 때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된다. 감정은 표현이 아닌 약속으로 굳어가고, 마음은 흐름이 아니라 형식이 된다. 그렇게 말이 쌓이지만, 정작 마음은 멀어진다. 말은 남고 감정은 사라진다.

사랑은 어떤 순간의 감정보다, 그 감정을 주고받는 방식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진다. 열정 하나만으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쌓인 경험들, 여러 번의 다툼과 그때마다 다시 건네는 말, 실망했음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 마음. 예상과 어긋난 날에도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그런 선택들이 반복되고 이어질 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은 하나의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고정된 틀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율되는 움직임에 가깝다. 서로를 하나의 모습으로 묶어두지 않고, 달라지는 시간을 받아들이며 관계의 균형을 새로 맞추려는 태도 속에서만 사랑은 지속된다. 감정은 희미해질 수 있지만, 존중과 신뢰는 시간이 쌓아올린다. 상대의 불완전함을 감당하고, 자신의 결핍을 숨기지 않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감정보다 깊이 연결된다.

그때 사랑은 기억을 지나고, 환상을 꿰뚫는다. 때로는 감정보다 앞선 의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다가오고, 같은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익숙한 말로 불리지만, 실은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된다. 사람은 그 복잡함 안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한다. 사랑은 이해하려는 끈질긴 시도이며, 완성보다 지속을 선택하는 감정이다. 특정한 대상을 향한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그 대상과 맺어온 관계의 질에 대한 기억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같은 화학 물질에서 이유를 찾는다. 생물학적 자극과 반응의 결과로 감정이 유도된다는 관점이다. 그들의 말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은 확실히 생리적 반응을 동반하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 자극과 반응으로 얻어진 유도된 정보. 그렇게 불러도 같은 언어로 반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를 떠올릴 때 찾아오는 설렘, 말없이도 전해지는 떨림 같은 감각을 단지 신경 화학 작용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함께한 시간 속에서 쌓여온 이해와 용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반복의 흔적들로 구성된 그 모든 축적된 서사의 밀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 설명보다는 기억에, 정의보다는 감각에, 과학보다는 경험의 언어에 더 가까운 감정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이에게 사랑은 자신을 끝까지 내어주는 일이다. 흐려질수록 더 또렷해지는 헌신의 그림자. 그래서 벽을 넘는 일, 오래도록 금지되어 온 감정의 탈출과 같은 단어 아래 놓였다. 단순한 화학 반응으로 환원될 수 없는, 기억과 상황, 시간과 관계의 복합적인 모습이다. 물론 그것을 붙드는 손의 모양은 제각각이었을 것이고, 어떤 사랑은 말없이 지속되었고, 어떤 사랑은 매번 되묻고, 다시 되뇌며 가까스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을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이 삶에 남기는 무게와 흔적까지는, 그 화학 물질들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치유나 회복, 더 나아가 구원을 기대한다. 많은 사랑의 서사가 결국 ‘구원’의 서사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감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상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은 단일하지 않다. 결핍, 소외, 집착, 통제의 욕망, 불안정한 애착이 얽혀 들어가며 때로는 아름답게 포장된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은 다른 감정을 고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언제나 혼합된 상태로 나타나며,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복합성을 숨긴다. 대중문화는 이 감정을 압축하거나 과장된 장면으로 재현하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사랑의 실체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로 그 왜곡을 통해 감정이 어떻게 소비되고 오해되는지를 되짚어보게 된다.

사랑은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쉽게 무너지는 감정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 존재의 일부로 동일시하며, 그 동일시는 곧 기대와 환상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현실의 상대는 언제나 그 환상과 어긋나며, 실망은 빠르게 애정의 붕괴로 이어진다. 그 안에는 타인을 향한 배려만이 아니라, 자신을 방어하고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겹쳐 있다. 이때 사랑은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소유의 언어로 변질된다.

현대 사회는 ‘자기 감정의 우선성’을 하나의 규범처럼 요구한다. 나의 욕망, 나의 감정, 나의 진정성이 중심이 되고, 타인의 감정은 쉽게 주변화된다. 그 결과, 감정은 더 이상 관계 속에서 공유되지 않고, 소비된다. 낭만적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관계는 소통이 아니라 소진의 양상으로 진행된다. 서로 연결되고 싶어 하지만, 그 연결은 각자의 기준 안에서만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관계는 확장되기보다 통제를 통해 좁아지고, 애정은 자주 집착으로 전이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발생하는 수많은 오해와 실패는, 감정의 복잡함이 통제되거나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아니라 질문이 필요하다. 사랑이 감정인지, 선택인지, 기술인지 묻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반복되는 해석의 과정이며, 끊임없이 질문될 때에만 비로소 그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만큼이나 감춰진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문학과 예술, 대중문화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의 핵심이다. 감정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스며 있고, 일상의 무게에 묻혀 있다가 빗소리나 오래된 노래 같은 우연한 계기로 되살아난다. 그때 감정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삶 전체를 비추는 하나의 구조로 작용한다.

사랑에 몰입한 사람은 일상의 선택조차 타인을 중심에 두고 내린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감정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결정이 된다. 사랑은 세상을 다시 보게 하고, 평범한 삶에 새로운 빛을 더한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흔들리고, 실망하고, 후회하며, 또다시 시작한다. 사랑은 선택이고 반복이며, 견딤이기도 하다.

인간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하려 하는가. 조류나 포유류처럼 짧은 보호 본능만으로 충분했다면, 우리는 왜 서로에게 이토록 오래 머무는가.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반복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해할 수 없는 날에도 곁에 있으려는 마음,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선택, 바로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연결’의 형태다.

이 연결은 처음엔 격렬하다. 외로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고, 기대에 대한 투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정은 선택의 문제가 된다. 감정이 깨어질 때마다 우리는 실패하고, 후회하고, 멀어진다. 그러나 이 반복은 의미를 남긴다.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미완의 감정 안에 오히려 삶의 진실이 놓여 있다.

사랑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흔들리고, 견디고, 다시 시작한다. 이 불완전하고 모순된 감정의 반복 속에서 인간은 고유한 존재가 된다. 사랑을 정의하려 애쓰기보다는, 그 과정을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설명보다 경험, 판단보다 존중. 사랑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기를, 서로를 향한 마음이 허락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바람 하나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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